A 선조들의 효충 유적을 간직한 마을 성곡리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77]장수면 성곡1리(배태)

선조들의 효충 유적을 간직한 마을 성곡리

2015. 09. 24 by 이원식 기자
▲ 주마산 둥지리봉

묵와 선생의 ‘효’, 아맹 선생의 ‘충’ 정신 남겨
장수의 비결, 자연에 순응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

성곡1리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예천 방향으로 가다가 장수 교차로에서 내리면 IC 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감천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50m 쯤 가면 우측에 장수석재와 장수쉼터(천궁)가 나오는데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성곡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꼬불꼬불 들길을 따라 가다가 보면 갈산2리(파지리, 바위실) 표석을 만나게 되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옛 신라 때 쌓은 갈산산성(높이 238m) 옆을 지나게 된다.

갈산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면 갈미이다. 마을을 둥글게 감돌아 오르면 성곡저수지가 앞을 가로 막는다. 우회 도로를 따라 저수지 위로 오르면 주마산이 가로로 뻗어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한 마을이 나온다. 여기가 장수면 성곡리 ‘배태’마을이다. 집들은 주마산 아래 구릉지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 아랫마실

지난 12일 오후 성곡1리 배태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여오진 이장, 김해년 노인회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마을의 역사와 선조들이 남긴 선비정신을 듣고 왔다.

▲ 마을표석

역사 속의 배태 
성곡리 지역은 조선시대 때 영천군 두전면에 속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두전리(豆田里)의 속방(屬坊)은 가라(加羅)[가래], 반지산(盤之山)[반지뫼], 두전(豆田)[모전], 지곡(池谷)[못골], 별태(別太)[배태], 파지곡(破之谷)[파지], 갈산(葛山)[갈미] 등 7방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이곳의 지명이 별태방(別太坊)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배태와 옛 이름 별태는 상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것 같기도 하나 마을 사람들은 “별태는 모르는 지명”이라고 했다.

그 후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두전면의 지동(池洞)과 성곡동(城谷洞)을 합하여 성곡리(星谷里)라 칭하고 영주군 장수편에 편입시켰다.

지명유래
옛 문헌에 보면 마을 뒷산을 주마산(走馬山) 또는 마산(馬山)이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떤 도사(道士)가 달리는 말을 소리쳐 세웠는데 달리던 말이 그대로 산이 되었다’하여 ‘주마산’이라고 부르게 됐다 한다.

또 마을 이름이 ‘배태’가 된 것은 주마산에서 유래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입지(위치)가 달리는 말의 배에 두른 띠 부분에 해당된다 하여 ‘배태’라 부른다”고 전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배의 띠’라는 뜻으로 배태(腹帶)라 쓰기도 하고, 어떤 문집에는 배태(培太)라는 기록도 있으나, 영주지(榮州誌)에는 별태(別太)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성곡(星谷)이라는 지명은 일제가 우리의 고유 전통마을인 ‘별태(別太)’ 또는 ‘배태’를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 ‘창지개명(創地改名)’하여 새로운 지명을 만든 것으로 보여 진다.

단양우씨 집성촌
성곡은 단양우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 우성만(73) 단양우씨 종중은 “입향조와 입향 연대에 대해 정확히는 알 수는 없으나 옛 어른들께서 ‘14대에 걸쳐 세거했다’고 전하고 있으니 대충 잡아도 420년 정도 된다”고 말했다.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찾아보기 위해 종친회 우병문 고문의 자문과 단양우씨 문희공파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보다가 애일당(愛日堂) 기문을 접하게 됐다.

애일당은 묵와(묵窩) 우전(禹甸)[1523-1588]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그 후손들이 1936년 마을 남쪽 산록에 건립한 추모지소이다.

권상규(權相圭)가 쓴 기문(記文)에 따르면 「주마산이 병풍을 두른 듯한 이 마을에 6,70호 인가가 깃들어 있으니 그 중 단양우씨가 2/3를 차지했다.-중략- 마산(馬山) 아래 숲이 울창하다. 공은 성곡(星谷) 양지쪽 분묘가 즐비한 이곳에서 고향을 지켰도다」라는 기록에서 ‘우전이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아맹선생 불천위 사당과 재사

그렇다면 우전이 장성하여 입향(1550년경)했다고 보면 465년동안 세거한 유서 깊은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전은 어릴 때부터 남보다 학문이 뛰어났으며 성장하여서는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다했다. 향리에서 많은 찬미가 있었기에 증자(曾子)와 자로(子路)의 효성에 비유하여 조정에 주달(奏達)하니 특별히 순능참봉(順陵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부모의 봉양을 못하게 된다는 이유로 간곡하게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안동권씨 불천위사당
애일당에서 구릉지를 따라 200여m 오르면 안동인 아맹(啞盲) 권창진(權昌震, 1597-1683)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재사가 있고, 그 우측에 불천위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묘소는 우측 10m 지점에 있다.

▲ 옛 정미소

권창진은 인조 13년(163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던 중 굴욕적인 화의 소식을 듣고는 출세를 단념하고 은둔한다. 스스로 아호를 아맹 즉 ‘세상을 말하지 않으니 입은 벙어리요, 하늘을 보지 않으니 눈은 소경’이라며 겸손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숙종 3년(1677)에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에 올랐으며 사후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현재 재사(齋舍)는 약 100년 전 묘소를 이장하면서 같이 이건해 온 것이고, 불천위사당은 옛 구호서원(鷗湖書院, 구성공원에 있었음)이 훼철되자 이건해 온 것이라 한다.

▲ 마을표석

성곡 마을회관

▲ 여오진 이장
▲ 우성만 어르신

여오진 이장은 “마을회관은 1995년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 100여명이 성금을 모으고, 지역 석재업체의 협찬, 영주시의 보조 등 총 6천 500만원의 기금을 마련하여 건평 52평, 슬러브벽돌조 2층 건물을 완공했다”면서 “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의 뜻에 따라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선비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김해년 노인회장은 “예로부터 성곡리는 장수마을로 이름이 나 있다”며 “우리마을은 현재 100 가구에 180여명이 살고 있으며, 모두 자연에 순응하면서 정직하게 살기 때문에 건강하고 장수(長壽)한다”고 말했다.
이인구 전 새마을지도자는 “우리마을은 보건복지부 선정 건강장수마을

▲ 김명순 부녀회장
▲ 우성만 어르신

(2012)”이라며 “사업비 1억원을 지원받아 장수노인 건강관리사업 및 여가활용 지원사업 등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장수마을”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 유수종(65)씨는 “여오진 이장과 마을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마을이 날로 살기 좋은 마을이 되고 있다”며 “올해 배태천 정비사업(보건소 옆 500m)이 완료되면 집중호우로 인한 재해를 예방할 수 있게 되고, 마을길도 넓어져 농산물 생산과 판매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인구 씨
▲ 윤태영 씨

아랫마을 가운데 성곡방앗간이 있다. 이 방앗간에서는 참기름을 짜고, 고춧가루를 빻고, 과일즙도 내린다. 이 방앗간사업은 시의 지원으로 기계를 설비하고 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한다. 이웃 갈산리 등 인근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착한가격으로 참기름과 고춧가루, 액즙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문의 전화가 많이 온다. 정직한 농산품을 원하시는 분은 김명순(64) 부녀회장 앞으로 연락주시면 착한정보를 얻을 수 있다. (010-3289-7107

배태마을 사람들

▲ 유슈종 씨
▲ 이재건 씨

마을 입구에 학교가 있었다. 1946년 마을 사람들의 기부와 성금으로 성곡분교장을 개교했다. 1951년 장수서부국민학교로 승격 되었다가 2007년 폐교될 때까지 1천 500여명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성곡 어린이집으로 배움터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학교 졸업생 이재건(59)씨는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한 학년 학생수가 40명이 넘었고, 전교생도 240명이나 됐다”며 “그 때 가을 운동회 때는 천여 명이 모여 축제를 즐겼다”고 말했다. 학교 앞에서 200m 가량 더 오르면 성곡보건진료소가 있다. 그 앞에는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건강관리에 많은 도움을 준다.

▲ 전춘하 씨
▲ 김연국 씨

기자가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윤태영(71)·전춘하(65) 부부가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멈췄다. 윤씨는 “성곡 사람들은 여든이 넘어도 모두 정정하고 농사일을 잘 한다”고 하면서 “농부는 농사일을 열심히 해야 건강하게 오랜 산다”고 말했다.

김해년 노인회장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2층 기와집 앞에 섰다. 이 집에 사는 김연국(58)씨는 “안동김씨가 성곡에 산 것은 약 200년 전”이라며 “이 집은 안동김씨 종택으로 1963년에 지은 집”이라고 말했다. 골목길을 따라 웃마로 올라가면 성곡정미소도 있고 성곡교회가 우뚝하다. 주마산 중턱에서 생산된 달고 야무진 ‘성곡사과’ 문의 [여오진 011-538-0186]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