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향교가 있어 향교마을, 학교가 많아 교촌마을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73]풍기읍 교촌1리(향교마을)

향교가 있어 향교마을, 학교가 많아 교촌마을

2015. 08. 31 by 이원식 기자

▲ 마을 전경
주세붕이 옮겨 세운 풍기향교가 있는 마을
옛 향교마을이 지금은 원룸마을로 변모

▲ 마을 표석
풍기읍 교촌1리(향교마을) 가는길
영주시내에서 풍기로 간다. 남원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가면 풍기 시가지의 중심이고 방향의 기준이 되는 십자거리가 나온다. 십자거리에서 직진하면 오거리가 나오고 계속 직진하여 중앙선 굴다리를 통과하면 도로 우측에 풍기인삼농협이 나온다.

여기서 비로사 방향으로 200m 쯤 올라가면 ‘교촌1리(향교마을) 표석이 나오고, 그 위쪽으로 풍기북부초등학교와 경북항공고등학교, 풍기향교가 연달아 자리 잡고 있다.

마을표석 ‘→’표 방향으로 들어서면 예나 지금이나 좁은 골목길이다. 왼쪽은 마을이고 오른쪽은 과수원이다.

골목 안 골목십자거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원룸이 즐비하고 하숙집 간판이 여럿 보인다.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가면 고향슈퍼라는 가게가 나오고 그 안쪽에 향교마을회관이 있다.

지난 16일 오후 2시 마을회관에서 김성욱 이장, 윤정희 노인회장, 정경자 부녀회부회장, 김일훈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옛 이야기를 듣고 왔다.

마을의 역사
풍기는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었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초에는 기천현(基川縣)이었다. 그 후 문종(단종의 아버지)의 태를 은풍현(殷豊縣)에 안치하면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豊基)라 칭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 후기 1849년 경 작성된 풍기군지에 보면 교촌리 지역은 풍기군 서부면에 속했다. 당시 서부면에는 서문리(西門里), 북문리(北門里), 고로촌리(古老村里), 신교리(新校里)[교촌], 구교리(舊敎里)[금계1리], 등구리(登邱里)[등드들], 백야동리(白也洞里), 욱금리(郁錦里)가 있었으며 순흥과 접경을 이루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풍기군 서부면의 신교리와 등구리를 합하여 ‘교촌리’라 칭하고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시켰다.

▲ 풍기향교
지명 유래
이곳을 교촌이라 한 것은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옛날 이 마을에 정림사라는 절이 있어 그 절 이름을 따서 정림촌(井林村, 亭林村)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풍기향교는 원래 금계1리 임실마을 서쪽에 있었는데 주세봉 군수가 부임하여 이 마을 정림사 절터로 옮겼다고 한다. 그로부터 동명도 신교리(新校里)가 됐고, 사람들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향교마을, 향교마, 향교말, 신교리 등으로 불러왔다.

풍기향교의 내력
풍기 향교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500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본래는 금계동 임실마을 서편에 있었으나, 1541년(중종 36) 주세붕(周世鵬)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문묘에 참배한 뒤 그 위치가 읍에서 너무 멀고 식수가 불편하다 하여 이듬해(1542)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1692년(숙종 18) 군수 정증(鄭증)이 구지(舊址)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 군수 임집(任집)이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조선시대 때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음력 2월과 8월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 옛 뒷창락(금계천)
마을의 옛 모습
김성욱 이장은 “교촌1리는 마을의 모양이 반월형이고 마을 중심으로 구릉이 뻗어 내려있는데 언덕 밑을 굼마라 하고, 언덕 위를 두들마로 불러왔다”면서 “읍에서 순흥통로 굴다리를 지나서부터 왼쪽 상가지역이 교촌1리이며, 동양대 앞 금계교 다리에서 장호교를 거쳐 금계2리 입구에 있는 교촌교까지가 교촌1리로서 391가구에 670명이 사는 큰 마을이 됐다”고 했다.

윤정희(70) 노인회장은 “마을 앞들을 ‘구름밭들’이라 하고 마을 뒷들을 ‘서다리굼들’이라 부르며 소백산 비로봉에서 시원하여 흐르는 금계천을 ‘뒷창락’이라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마을 앞을 약간 지나 소(沼)가 있었는데 소의 이름이 문동소(文童沼)라 했다”고 말했다.

문동소라 이름 한 것은 향교에서 강학하던 유생들이 여름철이면 이 소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1936 대홍수로 때 매몰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고 한다.

▲ 장호교
까치샘과 동신당 이야기
이 마을 노영숙(61)씨는 “마을 언덕 밑에 까치샘이 있었는데 동네사람들 모두가 이 물을 여다 먹고 살았다”고 하면서 “까치샘은 아주 옛날 마을이 처음 열릴 때 까치떼가 몰려와 샘터를 잡아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샘은 아무리 장마철이라도 샘물은 불어나지 않고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샘물이 줄지 않았다고 한다. 이 까치샘은 1961년 대홍수로 매몰되어 버리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마을 원로 김일훈(77) 어르신은 동신당 이야기를 들려줬다. “향교 앞에 수령 7백년으로 추정되는 굴참나무가 있었다. 높이가 25m 밑동 둘레가 3m 쯤 되는 노거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밑에 동신당(洞神堂)을 세우고 나무이름을 동신나무라 불렀으며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동신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두벌 논메기가 끝나는 7월이면 해마다 풋굿날을 정해 각자 집에서 음식을 마련해 이 나무 밑에 모여 농악놀이를 하면서 고단함을 달랬다고 한다.

마을의 애환과 유서(由緖)를 간직한 이 동신목은 1990년 경 고사하고 말았는데 이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애석해 했다고 한다.

▲ 항공고등학교
향교마을 학교
광복 후 문맹퇴치 사업에 헌신한 귀암(龜巖) 이성호(李性昊) 선생은 육영에 뜻을 두어 1948년 9월 24일 풍기고등공민학교 설립을 인가 받아 향교 앞에 교사를 신축하고 같은 해 11월 2일 개교한 것이 중학 교육의 시작이다. 1950년 정식 사립 풍기중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59년 공립중학교로 전환한 후 1969년 동부2리로 이전했다.

풍기고등학교는 1954년 개교하여 1992년 풍기종합고등학교로, 1995년 공업고등학교로, 2001년 과학고등학교로, 2007년에는 경북항공고등학교로 개칭됐다. 풍기북부초등학교는 1963년 개교하였고 병설유치원은 1981년 개원했다.

 

▲ 풍기북부초등학교
이 마을 박정헌(62)씨는 “풍기초에 입학했다가 4학년 때 북부초가 설립되어 북부초로 전학했었다”고 하면서 “1994년 교촌리 1번지에 동양대학교가 설립됨으로써 교촌은 한 마을에 유초중고 대학이 함께 존속하는 명실상부한 교촌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향교마을 사람들
향교마을회관은 2006년 신축 준공됐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현대식 건물을 짓고 냉난방 시설이 잘 갖춰진 회관을 마련했다. 마을 원로 장규두(87) 어르신은 “향교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보고 듣는 게 공부라서 공부에 관심이 많았고, 어렵게 살면서도 자식 공부시키는 일을 제일 중요시했다”면서 “해방 후 교촌에서 우수한 교육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2천년대 이후에는 서울대학교에 6명이 합격했다. 이는 향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마을 회관
한세창 새마을지도자는 “동양대가 개교되어 처음에는 하숙집이 하나 둘 생기더니, 10여년전부터는 원룸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지금은 30여채로 늘어나 향교촌이 원룸촌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정경자(54) 부녀회 부회장은 “동양대가 교촌에 설립된 후부터 마을이 농촌형에서 도시형로 변했다”며 “농사짓는 집은 30%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윤석주(70) 노인회 총무는 “어릴 적 마을의 모습은 전체가 초가집뿐이었고, 삼가동으로 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면서 “지금은 옛 집은 몇 채 안 되고 원룸과 연립주택으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10년 전 이 마을로 이사 왔다는 정순자(76)씨는 “마을 앞으로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지만 잡초가 우거져 접근조차 어렵다”면서 “동양대 앞을 흐르는 금계천을 정비하여 물을 가까이 할 수 있고, 물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윤정희 노인회장
▲ 김성욱 이장

 

 

 

 

 

 

▲ 한세창 새마을지도자
▲ 정경자 부녀회 부회장

 

 

 

 

 

 

▲ 김일훈 어르신
▲ 장규두 어르신

 

 

 

 

 

 

▲ 정순자 할머니
▲ 윤석주 노인회 총무

 

 

 

 

 

 

▲ 박정헌 씨
▲ 노영숙 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