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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68]이산면 용상1리(배해·용상골)

숭조(崇祖)의 유적을 간직한 마을 용상1리(배해·용상골)

2015. 07. 22 by 이원식 기자

▲ 배해마을 전경
▲ 용상골 전경
임진왜란 때 경주최씨 최사후가 개척한 마을 ‘배해’
옥천전씨의 성지 용상골, 숨겨진 보물 칠성루

이산면 용상1리(배해·용상골)가는 길

▲ 마을 표석
영주시내에서 남간재를 넘어 술바우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영봉로로 향한다. 동산고, 충혼탑을 지나 야트막한 고갯마루에 오르면 T자형 도로가 나타난다. 왼쪽 방향으로 500m 쯤 가면 산과 산이 몸을 낮추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준다. 성문을 통과하듯 고개를 넘으면 유서 깊은 배해마을이 옹성(甕城) 안에 오순도순 모여 있다.

용상골은 T자 도로에서 동쪽으로 난 박봉산 가는 길(농로)을 따라 약 5분정도 굽이굽이 산고개를 넘으면 박봉산 자락 골짝에 있는 마을이다.

용상1리는 T자 도로를 기준으로 동으로는 용상골, 북으로는 배해, 삼거리에 있는 새뱀이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 책 속의 용상리
조선 영조 때 시행한 행정구역을 보면 용상리 지역은 영천군 어화곡리였다. ‘어화곡리(於火谷里)에는 전단(箭丹), 조골, 노답(蘆畓, 간운)과 굴천(掘川)과 봉리(烽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배해’나 ‘용상’이라는 지명은 없다. 그러다가 왜정(倭政) 때 고쳤다고 하면서 ‘어화면은 신천동(新川洞), 용상동(龍上洞), 운문동(雲文洞)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용상골에 있는 용바위를 대표로 내세워 용상리가 되었다.

▲ 용상1리 노인정
배해의 유래
정태성 이장은 “배해는 박봉산 자락에 있는 마을로 지세(地勢)가 높은 지역으로 동에는 내성천이, 서에는 서천이 흘러 동서로 물을 안고 있어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배해’라 부른다”고 말했다. 배해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지만 마을의 유래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은 찾을 수 없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경주최씨가 마을 개척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경주최씨 분묘와 비문, 세계도, 정자 등을 통해 입향조와 입향연대를 추적해 보기로 했다.

경주최씨 문중 원로 최병호(88) 선생은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들었다”며 “ 최사후(괴헌공) 선조가 경주에서 이곳으로 와서 다래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최 선생은 또 “마을 앞산에 있는 괴헌공의 묘비에도 ‘장사랑선공감역(將仕郞繕工監役) 경주최공사후지묘(慶州崔公士厚之墓)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했다.

경주최씨 세계도에 의하면 「최사후(1583-1645)는 경주최씨(시조 최치원) 18세손으로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경주에서 영주로 이거하여 박산동(樸山洞, 뱃동네)에 시거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사후는 당시(선조16-인조23) 도성(都城)에 궁전을 지을 때 이 지역 목재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는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볼 때 최사후가 성년이 되어 이곳으로 왔다면 160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어 배해마을의 역사는 400년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경주최씨 외손인 봉화정씨가 1650년경부터 이곳으로 옮겨와 살면서 배해는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까지 사이좋게 살아왔다.

▲ 괴헌정
숭모(崇慕)의 상징 괴헌정
괴헌정(槐軒亭)은 배해마을 뒤에 자리잡고 있다. 경주최씨 종중에 의하면 “마을 입향조인 선공감역(繕工監役) 최사후(崔士厚) 선조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전국의 후손들이 기금(당시 2천만원)을 모아 건립했다”면서 “괴헌은 사후 선조의 호이며, 1985년에 정자를 완공하고 지역 유림을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냈다”고 했다.

▲ 회나무 고목
용상골의 내력
용상골은 박봉산 가는 길에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죽령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우뚝 솟은 박봉산봉에서 서기(瑞氣)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다.

이를 그냥 두었다가는 장차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우려한 이여송이 이곳에 와서 혈맥을 끊기 위해 큰 바위를 깨뜨려 버렸다. 그랬더니 홀연히 용이 날아와서 이마을 바위 위에 앉았다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용동, 용바위로 부르다가 용상골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박봉산 줄기에 들어앉은 이 산은 묘터가 좋기로 유명하며 옥천전씨(沃川全氏) 조상을 모신 묘가 왕이 용상에 앉은 형태라 하여 용상골이라 불렀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 칠성루
숨겨진 보물 칠성루와 휴계재사
칠성루(七星樓)는 용상리(龍上里) 칠성산(七星山)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절신(節臣)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이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영주 휴천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중종16년(1527) 이 곳에 천년 집을 지었다. [휴계공이 영주에 와서 처음 살던 곳이 휴천동이어서 호를 휴계라 했다]

칠성루는 그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가 건립하였고, 휴계재사(休溪齋舍)는 휴계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증손인 망일당(望日堂)이 1576년(선조 9)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곳 용상동은 현재 옥천전씨들의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으로 성역화사업이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숭조정신을 이어받은 옥천전씨(종손 전윤구) 후손들은 칠성루와 휴계재사를 온전하게 보존하여 영주의 숨은 보물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후손 전효우(52)씨는 “주변을 공원화하여 사람들이 찾아와 고택체험과 자연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 휴계재사
정병주 장군의 고향 ‘배해’
정병주(鄭柄宙) 장군은 영주시 이산면 배해에서 태어났다. 정 장군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최병호(88) 선생은 “어릴 적 마을 뒷동산 앞냇가를 뛰어다니며 함께 놀던 친구였다”며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육사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진 후 다시는 못 만났다”고 했다.

정 장군은 1949년 육사9기로 입학하여 한국전쟁 때는 육군 1연대 소대장으로 참전했고, 1974년 육군 소장으로 대통령 경호실 차장, 1975년 공수특전사령관에 임명됐다. 정 장군은 12·12 사건 때 군부 쿠데타에 맞섰다가 79년 12월 13일 새벽 특전사령부 사령관실로 들이닥친 부하들에 의해 왼팔에 총상을 입었고 이어 예편됐다. 그 후 1989년 3월 행방불명된 지 139일만에 안타깝게도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진짜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역사의 인물이다.

▲ 박산교회
용상1리 사람들
농번기인 요즘은 마을 사람들 만나기가 쉽지 않다. 장태성 이장의 주선으로 4일 오후 2시 노인정에서 마을 어르신들과 만나기로 했다.

이날 노인정에는 정길영(77) 노인회장, 유영흠(65) 이산면 전 협의회장, 김순난(58) 부녀회장, 반하준(65) 농업경영인, 최교두(82) 어르신 등 여러분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옛 이야기를 들었다. 장 이장은 “현재 배해에 23가구, 용상골에 13가구, 새뱀이에 15가구 등 40여 가구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면서 “박산교회는 100년 역사를 가진 교회”라고 했다.

김순난 부녀회장은 “경로행사는 노인정이 있는 배해에서 하고 주요 회의나 마을행사는 새마을회관이 있는 용상골에서 한다”고 말했다.

용상골에는 축사가 많고 화훼용 비닐하우스도 여럿 있다. 용상골에서 김용득(94) 어르신으로부터 박봉산 일곱봉우리(백봉, 두리봉, 돌봉, 알봉, 진혈봉, 금실봉, 문필봉)에 대한 이야기와 용상(龍上)에 대한 유래를 들었다. 용상골에서 15년째 국화재배를 하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여 억대 수익을 올리고 있는 김영정(53)·임명희(48)부부를 만났다.

국화 종묘를 심는 듯한 작업을 하던 김 씨는 “이 기계가 500만원”이라고 하면서 “현대 농업은 기계화되고 친환경 저농약로 가야 하기 때문에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정길영 노인회장
▲ 정태성 이장

 

 

 

 

 

 

▲ 김용득 어르신
▲ 김순난 부녀회장

 

 

 

 

 

 

▲ 최교두 어르신
▲ 최병호 어르신

 

 

 

 

 

 

▲ 반하준 씨
▲ 유영흠 전 이산면협의회장

 

 

 

 

 

 

 

▲ 전효우 씨
▲ 김영정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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