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정(情) 많고 효심(孝心)이 깃든 마을 문수면 ‘도래’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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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66]문수면 승문2리

정(情) 많고 효심(孝心)이 깃든 마을 문수면 ‘도래’

2015. 07. 02 by 이원식 기자

▲ 도래마을 전경
봉화정씨, 진주강씨, 예천임씨 300년 세거
자개지맥의 끝 내성천과 서천의 합수 지점

문수면 승문2리(도래) 가는길
시내를 벗어나 농협파머스에서 문수방향으로 향한다. 문수역을 지나면 적동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좌측방향 무섬마을 가는 길로 접어든다.

중앙선 철로와 나란히 강변길을 따라 1km 쯤 내려가면 ‘막현마을’ 표지석 앞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월호리로 가는 승평교 개체공사 현장을 지나게 된다.

▲ 도래마을 표석
조금 더 내려가면 서천과 내성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우측에 「승문2리 돌내, 情의 마을」이란 큼직한 표석이 나타난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승문2리 도래마을이다. 마을 입구는 영주댐 건설로 이설된 중앙선 다리기둥이 수문장처럼 마을 앞을 지키고 있다.

지난 21일 오전 도래마을에 갔다. 마을 회관 앞에서 임복규 이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회관 안으로 들어가 임상주 노인회장을 비롯한 여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들었다.

▲ 도래마을 전경
기록으로 본 마을의 역사
조선 후기에 쓰여진 한문본 영주지(榮州誌)에 의하면 승문2리 지역은 영천군 적포리(면)에 속했다. 적포리 속방(屬坊)은 아천방(鵝川坊)[아치날], 황조동방(黃鳥洞坊), 자만방(자巒坊)[자만동], 한정방(閒井坊)[한쟁이], 종릉방(鍾陵坊), 초방방(草芳坊), 주론방(注論坊), 노평방(蘆坪坊) 등이 있으나 승문이나 도래에 대한 기록 찾을 수 없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 승평동(繩坪洞) 일부와 석문동(石門洞)을 합하여 승문리(繩門里)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조선 후기에 석문동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승문리는 승평동(繩坪洞)의 승(繩)자와 석문동(石門洞)의 문(門)자를 따서 승문리가 됐다.

▲ 양지마
마을의 구성
소백산 고치령에서 갈려나온 자개지맥은 자개봉, 천마산, 대마산, 유릉산으로 이어져 도래마을 앞 내성천과 서천 합수지점에서 끝난다. 원래 지맥이 끝나는 지점에 혈(정기)이 왕성하기 때문에 명당자리가 많고 큰 인물이 많이 태어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 음지마
임상주(82) 노인회장은 “유릉산 끝자락(우무실목지 아래)에 자리 잡은 도래마을은 양지마를 본동으로 걸가(거랑가), 봄무기(봇목)로 이어지는 U자(겨먹이고기잡이)형 마을”이라고 했다. 전성덕(74) 어르신은 “1941년(일제강점기) 중앙선 철로가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는 바람에 양지마 대부분이 음지마로 이주하게 되어 마을이 분산됐다”고도 했다.

그 후 70여년이 지난 1913년 영주댐 건설로 철로가 이설되고 구철로가 철거됐다. 또 아랫마와 윗마를 잇는 새길(1914)을 열기도 하였으나 마을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 연자방아돌
도래의 지명 유래
마을의 옛 이름은 ‘도래’ 또는 ‘석문동’이라고 전해진다. 도래라는 지명은 원래 돌내(石川)라는 뜻으로 동래 앞 내(川)의 바닥에 돌이 많아 돌내로 부르다가 도래로 굳어졌다.

석문동은 큰 돌문이 있어서 돌문동 또는 석문동(石門洞)이라 불렀는데 석문이 있던 자리가 어룡바위(감상골 입구)라고 전해진다. 그 돌문이 얼마나 컸던지 석문을 열 때는 서천 건너 노트리(승평)까지 밧줄을 길게 늘이고 여러 사람이 당겨 석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때 밧줄이 평평하게 당겨졌다 하여 승평(繩坪)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밧줄을 받히던 곳을 ‘솔괴’라 했다한다.

▲ 탕건바위
당시 이 마을에 힘센 장사가 있어 석문을 열고 닫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고, 역사적으로 힘센 장사가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무섬(수도리) 가서 벼슬자랑 말고, 시낼(용혈2리)가서 글 자랑 하지 말며, 도래(승문) 가서 힘자랑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옛 서낭당터
마을의 입향조와 세 성씨
도래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선인들의 분묘의 소재와 구전에 의해 마을의 입향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봉화정씨 가문의 ‘반남박씨 할머니’가 아들 손을 잡고 마을을 개척했다는 구전이 전해오고 있다.

봉화정씨종친회 정동섭(도래출신) 총무는 “봉화정씨 14세손 자명(自明)이 어머니(潘南朴氏, 13세손 起紋의 부인)의 손을 잡고 입향했다는 구전이 있다”면서 “봉화정씨 선대의 묘지는 이산면 신암리, 장수면 반구리 등 선산에 안장되어 있으나 반남박씨(자명의 모)의 묘가 최초로 본 동내 입구에 안장되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족보에서 찾아 본 자명은 봉화정씨 14세손으로 정도전의 막내 동생 정도복(逸奉公, 諱 道復)의 후손이다. 자명은 조선 인조(仁祖,1623-1649) 때인 갑자(1624)년생이니 입향 연대를 1630-40년으로 추산할 때 지금부터 최소 약370년 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자명은 아들(승희) 하나를 두었으며, 승희는 2남 2녀를 두어, 큰 딸은 강기선(姜起善, 진주강씨 16세)에 시집보내고 작은 딸은 임애산(林愛山, 예천임씨 13세)에게 출가시켜 이곳에서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을을 개척한 박 할머니 증손 대에 이르러 증손서(曾孫壻)인 진주강씨, 예천임씨가 한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이다.

▲ 내성천과 중앙선 철도
마을 경로당 학유당(鶴遊堂)
승문2리 경로당은 1999년에 신축 완공됐다. 마을 사람들과 출향인 130여명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현대식 경로당을 지었다. 경로당에는 충효신의(忠孝信義)이라고 새겨진 동훈(洞訓)이 있고 ‘학유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정병조(76) 어르신은 학유당에 대해 “학(鶴)은 천 년을 살기 때문에 노인을 학에 비유하여 오래오래 천수(千壽)를 누리라고 학유당(당시 회관 건립을 주도했던 최병육씨가 이름을 지음)이라 했다”고 말했다.

임복규 이장은 “승문2리는 음력 정월 초삼일 날 마을회관에서 어르신들을 모시고 합동세배를 올리고 음식을 대접하는 전통이 수십년 간 이어가고 있다”면서 “도래는 정이 많고 효심이 지극한 것이 마을의 자랑”이라고 했다. 임수규(63)씨는 “승문2리는 지난 5월 전기안전공사가 선정한 전기안전마을이 됐다”며 “노후·불량 전기시설물 등 안전점검을 받게 되어 한결 안전한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 경로당과 정자
도래마을 사람들
도래마을은 정(情)이 많고 효심이 서려있는 아늑한 마을이다. 봉화정씨, 진주강씨, 예천임씨, 전씨, 최씨 등 여러 성씨들이 나누고 베풀고 상부상조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마을 개척한 ‘반남박씨 할머니’는 오늘로 치면 ‘여성 리더였다’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박 할머니는 후손들에게 말하기를 “정을 나누며 살라, 부모님께 효도하라, 그리고 학문에 정진하되 벼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

백순남(55) 부녀회장은 “마을 합동세배 때 사람들 모두가 합력하여 상을 차리고 정 나누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오랜 옛날부터 효심이 깃든 마을이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경로당을 지을 때도 출향인들이 고향의 어르신들을 위해 찬조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정영섭(59) 새마을지도자는 “마을의 주 농업은 벼농사이며, 수박, 생강, 고추와 일반 밭작물 재배를 하고 있다”며 “5-60대 젊은 농업경영인들은 축산과 대농(大農)으로 부농(富農)의 꿈을 일구어 가고 있다”고 했다.

경로당에서 만난 석숙자(81), 박간남(81) 할머니는 옛날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60년 전 마을의 모습은 초가집뿐이었다. 두레박샘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고 빨래는 내성천 빨래바위에 가서 했다”고 했다. 정병인(61)씨는 우리마을은 승문역에 대한 추억이 많다며 “1971년 임시 승강장이 생겨 하루 수백명이 이용하였으나 농촌 인구 감소로 1985년 여객이 중단됐다”고 말했다.

임복규 이장은 또 “2013년 철도 이설로 두 동강 난 동네를 연결하는 새길를 내면서 마을 사람들이 이에 대한 감사로 인재육성장학금 일백만원을 영주시에 기탁했다”고도 했다. 정동섭 총무는 “1970년대에는 80여가구에 약 400여명이 살았으나 지금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 35가구에 60여명이 살고 있으며 대다수 70~80대 고령의 노인이 살고 있다”고 하면서 탕건바위의 전설, 명당과 스님, 힘센 선조의 이야기, 서답바위, 실바위, 감상골, 초당골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 임복규 이장
▲ 임상주 노인회장

 

 

 

 

 

 

▲ 백순남 부녀회장
▲ 정영섭 새마을지도자

 

 

 

 

 

 

▲ 석숙자 할머니
▲ 박간남 할머니

 

 

 

 

 

 

▲ 전성덕 어르신
▲ 정병조 어르신

 

 

 

 

 

 

▲ 임수규 씨
▲ 정병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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