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서당, 골목마다 글 읽는 소리 넘쳐
장수면 두전4리(가천) 가는 길
두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조금 올라가면 2011년 조성된 두전전원마을 앞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영주국토관리사무소가 나타난다. 여기서 부터가 두전4리 300년 전통마을 ‘가천’이다.
지난 14일 오전 가천 마을 입구에서 송정홍(74) 어르신을 만나 송용환 이장댁으로 갔다. 송 이장의 안내로 한학자이신 송홍준(86) 선생을 뵙고 가천(佳川)마을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며, 경로당에서는 여러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어제와 오늘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
역사 속의 가천마을
마을의 유래
조선 숙종 이전 본 마을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은 어느 문헌을 통해서도 고증할 수 없다. 다만 선인들의 분묘의 소재와 구전에 의하면 야성송씨가 처음 마을을 열어 세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야성송씨 낙남선조(落南先祖) 눌재(訥齋)선생 칠세손인 세지공(世贄公)이 사일(泗日)에서 분가하여 풀밭을 개척하여 마을을 열었다는 설이 있고, 역시 눌재 선생의 구세손인 최기공(最基公) 호(號) 남창(南窓)께서 이 마을에 살았다는 사실이 동거집(東渠集)에 기록 된 것으로 보아 야성송씨가 처음 살았음이 틀림없다.
세지공의 생년이 1673년(현종 14년)이니 성년이 되어 분가했다면 숙종 17-8년(1693년경)이 되고, 동거공의 성년기를 추산하면 숙종 30년 경이되니 정확한 연대는 상고할 수 없으나 1693년(숙종 20년)으로 추정한다면 야성송씨 가라(加羅,가래)마을 입향은 320년 이상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을의 이름과 지형본 마을은 장수면 동북부에 위치한 정불산(淨佛山)을 등지고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앞에 가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의 옛 이름이 ‘가라(加羅)’에서 가내로, 가내(佳川)가 가래로 변천된 것은 가천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만 당초 가라(加羅)가 가천(佳川)이 된 것에 대해서는 한자의 의미로 볼 때 의문으로 남는다.
마을이 열린 이래 가뭄을 면치 못하였으나 1943년(일제치하)에 가담(佳潭)1호 저수지가 조성되고, 광복후에 재인터골에 가담2호 저수지와 오룡골에 가담3호 저수지 등 소규모 저수지가 조성되어 가뭄 없는 마을로 발전했다.
한학자 송홍준 선생
송 이장에게 마을의 자랑을 물었더니 “예로부터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마을”이라면서 “마을의 큰 어른이시고 영주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儒學者) 송홍준(宋鴻俊) 선생이 계시는 마을”이라고 했다.
송 선생댁에 갔을 때 선생께서는 옛 문집을 한글로 번역하는 컴퓨터 작업을 하고 계셨다. 여든여섯 연세에 번역을 하고 있다는데 놀랐고, 또 컴퓨터 활용능력과 이메일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는데 더욱 놀랐다.
선생께서는 마을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를 주면서 “마을 솔등 너머에 원시적인 도정 수단인 연자방아간과 당시 쓰이던 큰 바닥돌과 큰 맷돌이 있었는데 없애버린 것이 아쉽다”고 했다. 선생께서는 어릴 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고 잠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선생께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옛날에 마을에 서당(書堂)이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예전에는 집집마다 서당이고 골목에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라고 했다. 선생께서는 선조부-선친으로부터 한학을 익혔으며, 최근 12년동안 영주향교에서 유학(儒學) 강의를 해왔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움은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가천이 배출한 선비송용환(원윤) 이장댁 거실에는 선조들이 받은 교지와 과거 응시 시험지가 액자로 걸려있다.
송 이장은 “저의 8대조이신 휘(諱) 정환(鼎환)[호(號) 동거(東渠)] 선조께서는 조선 영조 때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성균관생원을 지냈으며, 이산서원 원장을 역임하는 등 학문정진과 후진양성에 힘쓰셨다”며 “유교의 덕목인 충효 실천에 모범을 보여 주변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동거문집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송 이장은 야성송씨 우후공파 15대손으로 소장하고 있던 목판(문집)은 안동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고 한다.
300년 수령의 동수목(느티나무)마을앞 논 가운데에는 밑둥 둘레가 6m이고 높이가 20m가 넘는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개척될 당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동수목을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수령을 300년 이상으로 보고 있다. 이 마을은 정월대보름날 두 곳에 서낭제를 지내는데 마을 앞 동수목(동신)에 먼저 제사를 지내고 정불산 돌무지(산신)에 제사를 올린다. 제관은 3일재계(3日齋戒)하고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축문을 읽고 소지를 올린다.가천경로당과 화수정(花樹亭)
가천 경로당은 마을 솔등 너머 공터에 자리 잡았다. 송용환 이장이 수년 전부터 시(市)에 건의하고 부지를 마련하는 등 과정을 거쳐 시의 지원으로 지난해(2014) 12월 준공했다.
이날 마을 경로당에서 송홍명(81) 노인회장과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마을의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송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마을 전체가 노인회원이야, 이장이 나이가 제일 적은 데 69세이니 전부가 노인이지”라고 했다. 송창남(77) 어르신은 “마을마다 경로당이 다 있는데 우리마을만 없어 아쉬웠는데 이장이 앞장서서 이렇게 좋은 경로당을 지었으니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다.
김정숙(80) 할머니는 “이제 여기서 회의도 하고 손님맞이도 하고, 잔치도 하는 등 여러모로 사용할 수 있어 참 좋다”고 말했다. 전후남(87) 할머니는 “나이 많은 노인네들은 여기서 먹고 자고 쉬고 집보다 더 편안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19살에 가천으로 시집와 7남매 기르면서 70년을 살았다는 최점순(85) 할머니는 “가천은 선비가 많고 양반동네로 소문난 마을이지. 집집마다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선비마을이고, 후손들이 모두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고 했다.경로당에서 나와 송 이장과 동네 한 바퀴 둘러 봤다. 경로당과 마주보고 있는 화수정(花樹亭)은 야성송씨 후손들이 돈종목족(敦宗睦族)을 위해 1972년에 세웠다고 하며, 마을엔 아직 야성송씨가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좁다란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옛 토실삼간에 기와를 얹은 집도 보이고, 벽돌집도 옛 모습 그대로다. 대부분 7-80년 전 마을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며, 오래전부터 다락논에서 농사짓던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골목길에서 경운기타고 돌아오는 송두익(78) 어르신을 만났다. “가뭄이 심해 저수지가 모두 바닥을 드러냈고 수박이 활착이 안돼 걱정”이라고 했다. 마을 앞 농로에서 만난 송인효(75) 어르신은 “옛날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마을에 학생이 50명 정도 됐고, 골목마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마을이 왁자지껄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