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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63]봉현면 노좌1리

고려 말 진중길이 학문을 크게 일으킨 마을 ‘노좌1리’

2015. 06. 10 by 이원식 기자

▲ 노좌1리 전경
행정 진중길과 추월당 한산두 모신 노계서원
과학영농과 창의경제로 부농의 꿈 이룬 마을

봉현면 노좌1리 가는 길

▲ 노좌1리 표석
풍기 남원사거리에서 풍기 IC방향으로 향한다. 봉현초 앞을 지나 히티재를 오르노라면 ‘사과나라’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산천이 모두 사과원이다. 히티재(400m)를 넘으면 끝없이 펼쳐지는 사과의 숲은 눈이 모자랄 정도이고 차량들은 그 사잇길을 달린다. 보이는 것은 모두 사과밭이요 굽이굽이마다 과수원길로 이어진다.

내리막길을 한참 가다보면 유전리 ‘꽃피는 산골광장’을 만나게 되고 조금 더 내려가면 노좌1리이다. 마을 입구에는 ‘꽃피는 마을 노좌1리’라는 표지석이 있고 마을은 햇살 좋은 평원에 자리 잡았다

옛 학교 자리엔 요양원이 들어섰고 번성했던 옛 시장터엔 새마을시대가 남긴 스레트집들이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킨다.

지난달 31일 오전 8시경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엄동섭 이장, 최종팔 전 이장, 이재선 부녀회장, 이분남(81) 할머니 등 여러 주민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옛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옛 봉현남부초
역사 속의 노좌리
「노좌리는 풍기진씨(시조 진필명) 18대손 진중길(秦中吉, 1308~?)이 고려 충숙왕(재위:1313~1330)·충혜왕(재위:1330~1332) 때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진중길은 1308년(충렬왕 34) 기주(基州, 풍기) 남쪽 노좌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지명이나 마을의 내력에 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다.

조선시대 때는 풍기군 노좌리면이었다. 1849년경 발간된 것으로 추정되는 풍기군지에 따르면 「노좌리면(魯佐里面)은 관문에서 남쪽으로 30리까지이다. 유음리(柳陰里), 이전리(泥田里), 대촌리(大村里), 하촌리(下村里)가 있으며 안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유음리와 이전리를 통합하여 유전리라 하고 노좌리면(노좌리, 유전리, 대촌리, 하촌리)과 와룡동면(臥龍洞面, 대촌리, 홍인동리, 신기리, 두치동리)을 봉현면에 편입시켰다. 이때 봉현면이 새롭게 탄생했는데 ‘봉현’이란 명칭은 “유전동에 있는 봉(鳳)고개의 이름을 따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봉고개가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 송림정자
노좌리 지명유래
봉현면 지명유래에 의하면 「노좌리는 약 800년 전 개척되었는데 누구에 의해 개척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노좌리는 노쟁이, 노자(奴者), 노좌(魯佐) 등으로 불러왔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앞산이 ‘주마산(走馬山)’이고 산 밑에 마부(馬夫)가 살았다고 하여 종 노(奴)자를 써서 노자(奴者)라 불렀는데 약 250년 전 진성이씨 경활이라는 선비가 마을 이름이 상스럽다 하여 노자(奴者)를 노좌(노나라 魯, 도울 佐)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이상 봉현면 지명유래]

노좌는 노나라 노(魯)자를 쓴다. 추로지향(鄒魯之鄕)에 나오는 노(魯)자다. 추로지향이란 맹자의 고향이 추(鄒)나라이고 공자의 고향이 노(魯)나라이므로 공맹(孔孟)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일러 추로지향이라 하였다. 실제 이 마을은 예절과 학문이 왕성한 곳임이 틀림없다. 7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행정(杏亭) 진중길(秦中吉, 1308~?)과 조선 중기의 유학자 추월당(秋月堂) 한산두(韓山斗, 1556-1627년)가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학문을 크게 일으켰던 마을이다. 또한 노계서당이 존재했던 것으로 봐서 노계(魯溪)라는 지명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 행정
진중길이 은둔한 땅 노좌리
풍기진씨 진중길(秦中吉, 1308~?)은 고려조 때 계림판관(鷄林判官)을 역임했으며, 학문과 문장과 행실로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이곳(노좌2리)에 봉황대(鳳凰臺)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중길은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행정(杏亭)이라 했으며, 자신의 호도 행정이라 했다. 은행나무를 심은 뜻은 성현인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행단(杏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뜻을 본받아, 진중길 역시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고자 함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진중길을 ‘은둔 군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숨어 살았다기보다는 햇살과 바람과 산을 벗 삼아 초연하게 자연을 가까이 즐기며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돋움한 마을이다. 하기야 뛰어난 학문적 소양과 빼어난 문장 실력, 반듯한 행실을 갖추었으니 당연히 관직에 나가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지식인으로서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진중길은 그 의무를 행하지 않고 권리도 누리지 않으려고 초야에 묻혀 산 은둔 군자인 셈이다. 진중길의 은둔은 고려 말 당시 혼란했던 나라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 노계서원
진중길과 한산두를 모신 노계서원
노좌1리 노인회관 옆에 노계서원이 있다. 본래 노계서원은 노좌2리에 있었으나 6.25 때 소실되고 2005년 이곳으로 이건했다. 노계서원은 이 고을의 선비들이 풍기진씨 현조인 행정 진중길 선생과 청주한씨 추월당공파 파조인 한산두 선생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조 10년(1786) 노계서당(魯溪書堂)에서 향회를 열어 강당에 진중길(秦中吉)과 한산두(韓山斗)의 위패를 봉안했다. 1787년 노계서당 뒤편에 서원 건축을 시작, 1788년 완공하여 묘호를 노계사(魯溪祠)라 하였다. 헌종 14년(1848) 노계서원(蘆溪書院)으로 승격되고 사당, 강학당, 신문, 주사 등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풍기진씨 진홍섭(76, 노좌2리) 종중에 의하면 “노계서원은 원래 노좌2리에 있었다. □자형 99칸 규모의 제향영역과 강학영역, 재사 등이 있었으나, 6·25 때 행정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했다. 그 후 2001년 가을 진씨(秦氏) 종중회의에서 다시 복원키로 결의하고 종중이 성금을 모아 2005년 노좌1리 풍기진씨 종중부지에 현재 규모의 서원을 신축 복원하게 됐다.

▲ 안동권씨 정자
자연과 사람이 만든 노좌1리 사과
‘영주사과를 대표하는 노좌리 사과는 무엇이 다른가?’ 이날 오전 9시경 장터거리 솔숲정자 인근에서 사다리 위에 올라가 적과를 하고 있는 황절자(74)·진숙자(75)·백춘화(68)·박인출(78) 할머니를 만났다. 창 넓은 모자에 목가리개까지 중무장한 할머니들은 콧노래를 불러가며 “싹뚝- 싹뚝-” 열매를 솎아낸다. ‘이렇게 수많은 손길이 쌓여 노좌리 사과가 만들어지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어르신들은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햇빛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수많은 손길과 정성이 모여 노좌리 사과가 만들어 진다”고 말했다. 노좌리 사과는 소백산 남쪽 해발 300m 이상의 산간 고랭지를 중심으로 재배된다. 청정자연 속에서 풍부한 일조량과 밤낮의 기온 차가 커서 단단한 과질(야무진 사과)을 자랑하며 신선도가 오래 간다.

▲ 노좌1리 노인회관
노좌1리 사람들
마을은 사과 적과가 한창이다. 바쁜 일손을 잠시 접고 기자를 안내해 주신 최종팔 전 이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장터거리에서 황대호 노인회장과 농약을 치고 있는 박연옥(53)씨를 만났다. 황 노인회장은 “노좌1리는 남여 노인회원이 80여명 된다. 지금은 일철이라 농사일을 하고 있지만 겨울에는 노인회관에 모여 밥도 같이 먹고 친교활동을 하면서 재미있게 지낸다”고 말했다. 최종팔 전 이장은 “황대호 노인회장은 지난 봄 100만원을 노인회에 기부하여 회원들이 남해안으로 관광 다녀왔다”며 노인회장을 칭찬했다.

엄동섭(54) 이장은 귀농 12년차로 지난해 이장이 됐다. 엄 이장은 “우리마을은 133가구에 300여명이 사는 큰 마을”이라며 “마을 발전을 위해 몸으로 뛰는 이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 옛 상가
엄 이장은 “마을에는 70세 이상 어르신이 65가구나 된다. 그래서 어르신들을 보필하는데 우선을 두고 마을 현안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추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면서 “안종근 새마을지도자, 황영목 전 이장, 진무식 운영위원장, 이재선 부녀회장, 김정자 생활개선회장 등과 합력하여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노좌리에는 풍기진씨가 20여 가구 살고 있으며, 평해황씨 20여호, 안동권씨 15호, 그 외 30여 성씨들이 모여 살면서 과학영농과 창의경제로 한국 제1의 부농을 꿈꾸고 있다.

▲ 엄동섭 이장
▲ 황대호 노인회장

 

 

 

 

 

 

 

▲ 이재선 부녀회장
▲ 최종팔 전 이장

 

 

 

 

 

 

▲ 황절자 노인회 여부회장
▲ 이분남 할머니

 

 

 

 

 

 

▲ 박인출 할머니
▲ 진숙자 할머니

 

 

 

 

 

 

▲ 백춘화 씨
▲ 박연욱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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