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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61]순흥면 덕현리(덕고개)

국망봉 아래 첫 동네 순흥면 ‘덕현(德峴)’

2015. 06. 03 by 이원식 기자

▲ 덕현리 전경
300년 전 박동수가 개척한 덕(德)고개 마을
자연이 준 덕(德)에 천석꾼 안 부러운 부자마을

순흥면 덕현리(덕고개) 가는 길
순흥면사무소에서 돌담길을 따라 200m 쯤 올라가면 읍내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배점, 초암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순흥저수지로 오르는 길에는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었고 먼 산 군데군데에는 하얀 봄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옛 배점초등학교 옆 삼괴정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Y자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좌측길은 ‘초암사’이고 우측길은 ‘성혈사’이다.

우측 성혈사 방향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배순의 대장간이 있었다는 ‘배점’마을 앞을 지나게 되고, 완만한 산길을 1Km 쯤 오르면 소나무숲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덕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길게 뻗은 덕현마을의 집들이 눈앞에 들어오고 멀리 두레골로 넘어가는 성재가 아련하다.

지난 17일 오전 덕현에 갔다. 오전 8시 반경 마을회관에서 홍성문 이장(55), 김도훈(75) 노인회장, 김명순(49) 부녀회장, 김덕녀(93) 할머니를 만나 마을의 유래에서부터 지금 사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 점마 전경
덕현리의 구성
덕현(德峴)은 조선시대 때 순흥도호부 내죽면(內竹面)에 속했다. 당시 이웃한 마을로는 속수(涑水), 원촌(院村)[원단촌], 금성(金城)[향교], 송림동(松林洞), 배점(裵店) 등이 있었다.

마을 입구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고, 집들은 골짜기 서쪽편으로 산을 등지고 동향하여 자리 잡았다. 마을 가운데 버스승강장이 있고 마을회관은 점마쪽 끝 지점에 있다.

마을회관에서 낮은 언덕을 넘어 500m 쯤 가면 점마가 있다. 덕현리는 덕고개에 40여호, 점마에 10여호 등 모두 50가구에 120여명이 산다.

서낭당 앞에서 만난 김사중(80) 어르신은 “마을입구에 있는 서낭당 숲거리는 외부의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 매년 정월대보름 서낭당에서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사를 올린다”고 말했다.

▲ 덕현 서낭당
덕현의 유래
덕현은 국망봉 아래 첫 동네로 국망봉, 상월봉, 성혈사가 모두 덕현 땅이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박동수라는 선비가 약 400여년 전 이 마을을 개척했다. 개척당시 이 고개에서 머루와 다래를 따 먹고 허기를 면했다 하여 덕 덕(德)자를 써서 ‘덕고개(德峴)’라 했다」고 전한다.

스토리텔링 치고는 조금 썰렁한 편이다. 그러나 덕현리 유래에 대해 그 이상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우선 이 마을에 사는 박 씨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곳저곳 다니다가 점마 과수원에서 적과를 하고 있는 박승철(62)씨를 만났다.

▲ 마을을 개척한 박동수의 묘
마침 박 씨는 박동수의 후손이었다. 집으로 가서 반남박씨 세보(世譜)를 펴 놓고 박동수의 내력을 찾아봤다. 박동수(朴東琇, 1685-1759)는 반남박씨(潘南朴氏) 판관공파(判官公派) 17세손으로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의 7대손이다. 박동수는 영주 두서(杜西, 뒤새)에 살다가 1710년 경 덕골을 개척하여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부는 문경(文經, 1665-1719)이고 조부는 예기(禮基, 1684 졸)이다.

덕현 초입 마을 뒷산(관음암 앞)에 박동수의 묘가 있다. 후손 박승철씨는 “박동수 선조는 자연이 준 은혜 덕으로 마을을 개척할 수 있었다”며 “후손들에게 자연에 순응하며 널리 덕을 베풀며 살라는 당부를 했었다”고 말했다.

박동수의 후손들은 자연에 감사하면서 자연이 준 은혜로 이곳에서 300여 년간 세거해 왔다. 이 마을 원로 박재서(75)어르신은 “지명 유래에는 박동수 선조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 박동수의 조부 예기(禮基)선조가 먼저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고 말했다.

▲ 나한전 꽃창살
점마의 유래
소백산자락길 12자락 종점에 있는 점마는 예전에 쇠를 녹여 솥을 만드는 솥점이 있다하여 ‘점마’라 부른다. 이 지역은 솥점뿐만 아니라 사기그릇을 굽는 사기점, 기와를 굽던 와뚠지(瓦屯地) 등 당시 생활용품을 생산하던 곳이었다. 덕현 아랫마을이 배점이다. 배점마을 뒷산에는 배순의 대장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옛 순흥부 인근 지역인 이곳(덕골, 배점)은 당시 생활용품인 솥, 그릇, 기와, 농기구 등을 생산하던 곳으로 요즘으로 치면 공업지역이라 할 수 있다. 점마에 사는 백옥순(63)씨는 “석천계곡과 추목동계곡 합수지점에는 사기점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주변에 땅을 파면 지금도 기와조각, 사기조각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 성혈사
천년고찰 성혈사
덕현리에 천년고찰 성혈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덕고개 서낭숲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급경사길 1Km 쯤 오르면 성혈사에 다다른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성혈사에는 보물 832호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에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꽃창살’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절 아래 300m 지점에 성인이 나온 암굴이 있어 성혈사(聖穴寺)라고 했다 한다.

성혈사 나한전은 조선 명종 8년(1553년)에 지어진 것을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다고 하니 꽃창살의 나이가 400살이 다 되어간다. 오랜 풍상을 겪은 꽃창살 앞에 사람들이 모여 사진을 찍기도 하고 더듬어 보기도 한다. 아마도 옛 목공의 손길을 느끼면서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아 보인다. 문득 생각했다. 이 마을을 개척한 박동수 입향조는 ‘이 유명한 꽃창살을 구경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관음암
마을 속에 자리 잡은 관음암
덕현마을 입구 관음암 표지판에서 좌회전하여 골목길로 200m 쯤 올라가면 ‘관음암’이란 암자가 있다. 2003년 원공(源空)스님이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창건한 관음선원이다. 이곳은 원공스님과 마음을 나누는 행복한 도량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며, 아름답고 행복한 나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부처님오신날을 1주일 앞 둔 이날 관음암에도 연등이 걸리고, 주지스님은 불자들을 맞이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덕현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관음암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스님은 “암자와 신록이 어우러져 참 아름답다”고 하면서 “자연이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원공스님은 “마을 사람들과 스리랑카 성지순례도 함께 다녀 올 정도로 친하다”면서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다보니 이제 덕현사람 다 됐다”면서 웃는다. 관음암은 덕현마을 속에 자라잡고 있으면서 마을 사람들의 절집이 됐다.

덕현마을 사람들
홍성문 이장은 마을의 자랑은 덕(德)이라면서 “마을 이름을 덕현(德峴)이라 한 것은 덕을 베풀고 살라는 뜻”이라며 “덕은 외롭지 않다는 옛 말이 있는가 하면 덕 앞에 겸손해 지고, 덕을 나누면 늘 함께 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홍 이장은 또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널리 덕을 베풀고 있으며, 여러 성씨가 합력하여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김명순 부녀회장은 “마을 사람이 성금을 모아 경로당을 새로 짓고 건강 관리실도 지었다”면서 “어르신들의 수복강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효행이 지극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김도훈 노인회장은 “우리마을도 노인이 많은 마을”이라며 “마을 인구 120명 중 노인회원이 44명”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또 “지금 70대 노인들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과수원 10마지기 정도는 거뜬히 농사를 짓는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 마을에는 온갖 풍상을 다 겪어 온 이 땅의 어머니 김덕녀(93) 할머니가 살고 있다. 30대 (1955년)에 어린 사남매를 데리고 덕현에 왔다. 내 땅 한 평 없는 처지에 산전을 일구어 조, 감자, 옥수수, 콩을 심어 이것을 주식으로 먹고 살았는데 어머니에게는 늘 옥수수밥도 돌아오지 않아 쑥과 산나물로 연명해 왔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지금은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천국에 사는 것 같다”며 “소백산이 준 은혜로 두 아들이 과수농사를 크게 하여 천석꾼 못지않게 잘 산다”고 말했다. 점마 뒤 성재로 오르다 신영근(61)씨와 전진철(55)씨를 만났다. 과수원 그늘에 앉아 사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덕현에 사과를 심기 시작한 것은 30년 전이며,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인 사과 생산지가 됐다”면서 “7가구는 억대 이상 수익을 올리고 있고, 노인들도 평균 10마지기 이상 농사를 지어 4~5천만원의 수익을 올린다”고 말했다.

덕현마을 사람들은 봄이면 산나물을 뜯고 가을이면 송이를 따는 등 자연이 준 덕(德)에 감사하면서 세상에 덕(德)을 베풀며 산다. 

▲ 홍석문 이장
▲ 김도훈 노인회장

▲ 김명순 부녀회장
▲ 김덕녀 할머니

▲ 김사중 어르신
▲ 박재서 어르신

▲ 박승철 씨
▲ 백순옥 씨

▲ 신영근 씨
▲ 전진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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