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천주교 최초 수덕자 홍유한의 은둔마을 ‘배나무실’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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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탐방[58]단산면 구구3리(배나무실)

천주교 최초 수덕자 홍유한의 은둔마을 ‘배나무실’

2015. 05. 08 by 이원식 기자

▲ 중마전경
큰 배나무가 있어 ‘배나무실(梨木谷)’이라 불려
홍유한의 호는 농은(隴隱), ‘주님의 산에 숨은자’

단산면 구구3리(배나무실) 가는 길

▲ 마을표석
서천교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 방향으로 향한다. 귀내-장수고개-피끝(동천1리)을 지나 조개섬(동촌2리) 회전교차로에서 단산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새내(사천1리) 앞을 지나 바우(파회)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구구교를 건넌다.

옛 구구초교가 있던 구구1리 오티마을, 구구2리 구두들을 지나 야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 안 쪽으로 들어가면 구구3리 배나무실을 만나게 된다.

마을 입구에는 이목(梨木, 배나무)이라는 표석이 있고 마을은 산자락을 등지고 남향하여 길게 이어져 있다.

지난 달 25일 오전 구구3리 노인회관에서 김동일 이장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을 만나 배나무실의 유래를 듣고 난 후 김 이장의 안내로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마을의 구성과 유래
구구3리는 아랫배나무실, 중마, 윗배나무실로 구성돼 있으며 옛날에는 윗마가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아랫마가 중심마을이다. 수나리 저수지가 있고, 골이 길어 예로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다. 예전에 중마에 살다가 지금 아랫마에 살고 있는 박영원(79) 어르신은 “마을이 처음 열릴 때 큰 배나무가 있어 ‘배나무실’이라 불렀으며, 배나무가 잘 자라는 땅이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수나리 쪽에 배나무가 많았다”고 했다

윗마에 살고 있는 이화선(67)씨는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1592년) 무렵 경주김씨가 다래넝쿨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후 감곡에 살던 우계이씨 일부가 1700년 경 이곳으로 이거해 왔다”고 했다. 홍유한 선생이 정절의 덕을 실천하기 위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775년이다.

▲ 아랫배나무실
역사 속의 배남실
순흥지(順興誌)에 의하면 구구리 지역은 순흥부 동원면(東園面)이었다. 동원면의 방곡(坊曲, 단위마을)에는 파회(波回)[바우], 오현(梧峴)[오티], 구고(九皐)[구두들], 이목곡(梨木谷)[배남실], 사천(沙川)[새내], 등영(登瀛), 구미(龜尾), 자분리(自分里), 오상(五相) 등이 있었다.

구구리는 구고(九皐)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구두들 마을 뒷산에 무학봉(舞鶴峰)과 관련이 있다. 옛 선비들은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傳)의 옛 뜻을 따라 ‘구고’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구고, 오현, 이목곡 등 일부를 병합해 ‘구구리’로 칭하고 단산면에 편입시켰다.

▲ 윗배나무실
당시 일제(日帝)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옛 마을 ‘구고(아홉 구九자, 소리 고皐자 또는 언덕皐자)’란 지명을 없애버리고 구구(아홉언덕, 邱)리로 개칭해 버렸다. 구구3리 이목곡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사람들은 ‘배나무실’이라 부르다가 짧게 줄여서 ‘배남실’이라 부르기도 한다.

홍유한의 유택지(遺宅地)
홍유한 선생의 8대손 홍기동(58, 배남실)씨와 유택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 효자문 안으로 들어서니 새마을시대 때 개축한 것으로 보이는 허술한 기와집 한 채가 있고, 마당에는 천주교 안동 교구청이 1995년 홍유한 선생 선종 210주년을 기리며 마련한 유적비가 있어 이곳이 성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후손 홍씨는 “우리가 어릴 적에는 이 자리에 □자 초가집이 있었고 마당에 샘이 있었다. 초가는 방 5칸, 큰마루, 작은마루, 방앗간, 부엌 2칸, 대문간, 옆문, 마구간을 갖춘 전형적인 농촌 주택이었다”며 “1960년대에는 풍산홍씨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돌아가시거나 떠나고 지금은 한 집 뿐”이라고 했다.

▲ 홍명중의 정려문
홍 씨는 또 “이 정려문은 1724년(경종4년) 효자로 정려된 홍 선생의 조부 홍중명 선조의 정려문이다. 홍유한 선조가 서울 아현동을 떠날 때 정려문 현판만 가지고 예산으로 갔다가 다시 이곳에 정착하였으나 집안 사정으로 정려문를 세우지 못했다. 그러다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족질 홍익주의 도움으로 정려문을 세우게 됐다”고 말했다. 현 정려문은 2014년 영주시가 중수했다.

한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 홍유한
홍유한(1726~1785년) 선생은 충청도 예산의 양반 명문가문의 출신으로 정조대왕의 외가 집안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1784년)보다 30여년 앞서 천주신앙을 받아 들였던 한국 천주교 최초 수덕자다. 풍산홍씨(시조 之慶) 16대손인 홍유한(洪儒漢)은 아버지 홍창보(洪昌輔)와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에게서 1726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유한은 8, 9세에 이미 경서를 두루 읽고 백가서를 모두 섭렵했다. 그는 한번 눈을 거치면 바로 암기하는 재주를 지녀 사람들이 신동이라 일컬었다. 홍유한은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다. 1750년경부터 이익 선생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등 서학(西學)을 연구할 때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 유택지와 유적비
홍유한은 자신의 호를 논두렁 농(隴)자에 숨을 은(隱)자를 써서 농은(농隱, 천주교에서는 ‘주님의 산에 숨은자’라 함)이라 하고, 조용히 천주교 수계생활을 했다. 1756년(영조32년) 그는 오묘한 진리를 깨달아 솔선 실천하고자 서울집을 팔고 고향 예산(禮山) 여촌(餘村)으로 옮겨 18년 동안 살았다. 이곳도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많아 1775년(영조51) 영남땅으로 내려와 순흥 동쪽 숲을 개척하여 터전을 일구어 자리 잡았으니 바로 구고리(九皐里, 천주교 기록에는 ‘구들미’라 함) 배나무실이다.

그는 자비심과 정의감이 투철하면서도 희비애락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는 위엄이 있었다. 본시 기질이나 신체가 강건한 편이었던 그는 지나친 고행과 절식으로 점차 몸이 쇠약해졌으나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1785년 1월 30일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구고에 온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 구구수목원
배남실의 다른 모습
김동일 이장은 마을의 자랑거리로 구구수목원과 대미실 인삼농장을 소개했다. 수나리 저수지 안쪽 골짝에 자리잡은 구구 수목원(아아조경)은 2만여평의 산지를 개간하여 수만 그루의 조경수와 꽃나무를 길어내고 있다. 김 이장은 “아아조경은 전국에 대형수목원 여럿을 운영하고 있는 나무전문업체다. 이곳은 생산, 출하, 조경, 저장 등 나무은행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라며 “인근 유치원 등에서 견학 오는 학생들이 가끔 있다”고 했다.

대미실 인삼농장은 마을 남쪽 대미골에 있다. 이 농장 김향윤(60, 금산) 사장은 12년 전 지인의 소개로 땅을 매입하여 농지 4만 3천평을 개간했다. 김 사장은 “산 좋고 인심 좋은 배남실에 와서 농장을 개간하게 되어 큰 행운을 얻었다”며 “현재 5천여평에 삼포를 경작하고 있으며, 앞으로 2만평 정도로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리 농촌의 새로운 모습이다.

▲ 큰샘
배나무실 사람들
홍유한 유택지 인근에 배나무실 노인회관이 있다. 이날도 어르신들 10여명이 모여 점심을 함께 했다고 한다. 회관 사랑방에서 김동진(80) 노인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마을은 3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총인원 52명 중 노인이 30명 이 넘으니 농촌은 어디나 노인 뿐”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김원수(77) 어르신이 말을 이었다. “나도 객지생활 하다가 나이가 들어 고향에 왔다. 우리 후손들도 나이 들면 고향을 찾아 올 것”이라고 했다.

경로당 안방에는 최영수(84)·차순예(83)·안중임(80)·김군자(72) 할머니가 마을을 찾은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할머니들은 “마을에서는 홍유한 유택지를 ‘홍문안집’이라고 부른다. 풍산홍씨 효자문 안에 있는 집이란 뜻”이라면서 “천주교 성지순례자들이 많이 찾아오고, 관광객들도 가끔 오고 있으나 차 세울 곳도 없고 주변이 허술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최영수 할머니는 “예전에 동네 사람들은 산 밑에 있는 큰 샘물을 길어다 먹고 살았다. 당시 홍문안집에는 마당에 샘이 있어서 이웃집들은 그 샘을 이용했었다”고 말했다. 중마에 살고 있는 박금복(59) 부녀회장을 그 집 앞 텃밭에서 만났다. 부녀회원이 몇 명이냐고 물었더니 “마을 할머니들이 모두 부녀회원”이라며 “마을의 행사 때나 경로잔치 때는 할머니들이 모두 나서서 음식을 장만하고 설거지를 한다”고 말했다.

영주시는 2017년까지 사업비 45억 원을 들여 이 일대를 유적지로 정비해 관광자원화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홍유한 고택을 옛 모습(초가□자 집)으로 복원하고, 수덕생활체험관과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 김동일 이장
▲ 김동진 노인회장

 

 

 

 

 

 

▲ 박금복 부녀회장
▲ 홍기동 새마을지도자

 

 

 

 

 

 

▲ 최영수 할머니
▲ 차순예 할머니

 

 

 

 

 

 

▲ 안준임 할머니
▲ 박영원 어르신

 

 

 

 

 

 

▲ 김원수 어르신
▲ 김군자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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