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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57]이산면 두월1리(두들, 덕골)

달(月) 뜨면 말(斗) 같은 풍광, 이산면 두월(斗月)1리

2015. 04. 30 by 이원식 기자

영주댐 수몰로 떠나는 마을 ‘두들’
새롭게 떠오르는 마을 ‘덕골(德谷)’

이산면 두월1리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남간재(영주중) 넘어 술바우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영봉로로 향한다. 충혼탑을 지나고 용상2리(구 백룡초) 앞을 통과하여 가다보면 달래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은 영주댐 수변도로 공사로 길이 복잡하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달래고개에 오르면 원림보건소가 세워지고 두월마을회관이 들어서는 바람에 새마가 만들어지고 있다.

두월교를 건너면 옛 두월초교가 초라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으며 괴헌고택과 덕산고택은 아직 옛 자태를 잃지 않은 채 문화재단지로 이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두 고택 앞을 지나면 내성천을 건너는 새로운 두월교가 막바지 공사 중이고, 신설 중인 수변도로는 꼬불꼬불 산자락을 따라 이어진다.

서낭당 동수나무 앞을 지나 500여m 쯤 오르면 야산을 등지고 남향하여 길쭉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덕골(德谷)이다. 지난 19일 오전 덕산고택과 덕골경로당에서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두들의 역사와 덕골의 내력을 듣고 왔다.

▲ 서낭당과 동수목
두월리의 역사
1413년(태종13) 지방행정구역 개편 때 두월은 영천군 임지리(林只里)에 속했다. 영주지(榮州誌) 괴헌고택본에 의하면 「임지리의 속방(屬坊)은 고감(高甘)과 어리안(於里安)과 퇴일(退逸)과 창팔래(昌八來)와 황분토(黃墳土)와 두월(斗月)과 서을매곡(鋤乙每谷)과 우안촌(愚顔村)과 장병곡(藏兵谷)과 구수천(九水川)과 호마곡(呼馬谷)과 가자동(加資洞)이다. 마을은 땅이 좁고 밭이 적으며 다만 군사(軍士)들만 거주할 뿐이다. 지금은 곧 사족(士族)들이 많이 우거하고 있고 이산서원을 이건하여 마침내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암송하는 어진마을로 변했다」라고 기록했다.

언제부터 두월(斗月)이란 지명을 사용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두들마을에 달이 뜨면 마을 풍광이 말(斗)과 같다 하여 말 두(斗)자에 달 월(月)자를 써서 두월(斗月)이라 했다고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일제가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 풍기, 순흥 3개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면서 두월(斗月)은 봉화군 상운면에 이관했다. 그러다가 1973년 7월 1일 봉화군에 이속되었던 두월과 내림(內林) 2개리가 봉화군으로 이속된 지 59년만에 영주군 이산면에 복귀됐다.

▲ 두들마을 항공사진
▲ 두들마을 전경
연안김씨가 터 잡은 두들마을
옛 두월초교와 덕산·괴헌고택이 있는 이 마을을 ‘두들’이라 한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내성천 연안을 낀 이곳은 넓은 들이 있고 두월산 자락 언덕 위에 마을이 있다하여 ‘두들’이라 했다”고 전한다. ‘두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덕산·괴헌 고택이 있기 때문이다.

▲ 덕산고택
덕산고택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산공(德山公) 김경집(慶集, 延安金氏)이 1756년(영조32년) 두암(신암2리 머름)에서 옮겨와 터를 잡고 지은 집이다. 그 옆에 있는 괴헌고택은 덕산공이 1779년 아들 괴헌(槐軒) 김영(金瑩)을 살림 내놓을 때 지어준 집이다.

▲ 괴헌고택
덕산고택은 아버지의 집이요 괴헌고택은 아들의 집이다. 괴헌은 1804년(순조4) 식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승정원부정자(承政院副正字),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냈다. 이 후 연안김씨들은 두들에서 259년 동안 세거해 오다가 영주댐 수몰로 떠나게 됐다.

▲ 덕골마을 항공사진
▲ 덕골마을 전경
충주지씨가 개척한 덕곡마을
충주지씨(忠州池氏, 始祖:池鏡) 영주 입향조는 29세 언국(彦國)이다. 언국의 손자 원경(元勍)이 조선 정조(1777~1800재위) 무렵 영주 광승(휴천1동)에서 덕골로 이주했다.

이는 덕산공이 두들에 터를 잡은 연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원경의 후손 지용한(82) 어르신은 “입향조 원경 선조께서 다래덤불을 헤치고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학문을 장려하고 의(義)와 덕(德)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덕골(德谷)이라 했다”고 말했다.

1950-60년대까지 충주지씨 10여 집이 사는 집성촌이었으나 새마을시대를 지나고 산업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도시로 떠나기 시작하여 지금은 5~6집이 살고 있다. 현재 덕골에는 충주지씨, 단양우씨, 전의이씨, 안동김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덕골은 지금 교통이 편리해 지고 농축산업이 활발하여 떠오르는 마을로 주목받고 있다.

▲ 옛 두월초
갈마음수형 명당 갈마골
옛 두월초에서 해맬방향(북쪽)으로 200m쯤 올라가다 도로 우측에 있는 골이 갈마골(葛馬谷)이다. 풍수지리설에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명당터라 하여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갈마골이 고향인 송기선(57)씨는 “예전에는 야성송씨 현령공파 후손들이 5~6집이 살았으나 6·25 전후해서 일부 떠났고, 1960년대 소도둑 피해를 본 후 두들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갈마골 안쪽에는 옛 도림서당(道林書堂)이 있으나 역시 수몰로 문화재단지로 이전하게 된다. 도림서당 김석기(덕산고택 주손) 당장은 “1625년(인조3)에 건립된 도림서당은 지역 인재양성의 요람이었다”며 “1903년 규모를 8칸으로 확장하여 지역 학동들의 기초교육을 담당하는 주요 교육기관이었다”고 말했다.

가자골과 시르미
두들 남쪽 내성천변에 가자골과 시르미가 있었다. 가자골은 참봉(參奉) 송수(宋琇)가 시묘차(侍墓次) 영천 수내(禾川)에서 입촌한 이래 여산송씨가 세거하던 곳인데 지금은 모두 증산(甑山:시르미) 등으로 이거했다. 이에 허전함을 느낀 후손들이 1931년에 동구(洞口) 남목하(楠木下)에 대(臺)를 축조하고 송씨의 옛터임을 상징하는 뜻에서 파조택성(派祖宅星)의 아호인 가암(佳巖)을 인용하여 대의 암벽에 가암동천(佳巖洞天)이라 새겼다고 전해진다.

시르미는 가자골에서 더 남쪽에 있다. 마을 뒷산이 떡시루 같이 생겼다하여 시르미라고 불렀다 한다. 여산송씨들이 4집 살았으나 수몰로 모두 떠났다.

▲ 덕산정사
덕골에 있는 덕산정사
덕산정사(德山精舍)는 덕골마을 초입 좌측 산록에 북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덕산정사는 진용교위충순위(進勇校尉忠順衛)를 역임한 연안김씨 영주 입향조인 김세형(金世衡)의 8대손인 덕산 김경집(金慶集, 1751~1794)이 이곳 두들마을에 처음으로 터전을 잡고 난후에 건립한 정자이다. 덕산 김경집은 이곳 덕산정사에서 독서와 시를 지으며 자연과 벗하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덕산고택 주손 부인 권춘자(80)여사는 “덕산고택은 수몰로 두월을 떠나지만 덕산정사는 이곳에 남아 선조들의 선비정신을 이어 가게 될 것”이라며 “덕산고택 주변 꽃나무를 옮겨 심으면서 선조들이 남긴 귀한 말씀과 정신도 이곳에 옮겨 심는 중”이라고 말했다.

▲ 평해황씨 추원재
덕(德)으로 사는 덕골 사람들
영주시한우협회장이기도 한 김삼주 이장은 “두월1리는 두들과 덕골로 구성되어 있고, 46호에 100여명이 살고 있다”며 “영주댐 수변도로와 두월교 신설에 맞춰 덕곡천 하천정비사업, 농업용수시설공사, 간이상수도 시설 등 공사가 한창”이라고 설명했다. 지용원(74) 노인회장은 “온갖 풍상을 겪으며 500여년 동안 마을을 지켜 온 동수목(느티나무)이 영주댐 수몰로 이사를 가게 됐다”며 “2년전 분을 떠 놓았다가 시림방향 소공원으로 옮겨 심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 약사여래불
장영자(63) 부녀회장은 문화재(경북문화재 자료223호)로 지정된 부처골 부처바위를 소개했다. “마을 사람들은 약사여래석불(藥師如來石佛)은 몰라도 부처바위는 잘 안다”면서 “부처바위 부처님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일품이어서 해뜰무렵 햇살을 듬뿍 머금은 부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고 말했다.

김경동(78) 어르신은 “덕동 안쪽에 삼판서고택의 두 번째 주인이신 평해황씨 미균(米균) 황유정(黃有定)의 신도비(神道碑)와 추원재(追遠齋)가 있고, 맞은편 산 중턱에 미균 선생의 제단(祭壇)과 평해황씨 선조 묘소가 있다”고 했다.

이 마을 곽옥순(76) 할머니는 “덕골 사람들은 모두 착하고 온순하다”고 하면서 “일손이 부족할 때는 품앗이로 서로 돕고, 정 나누기 하면서 산다”며 마을을 자랑했다. 이 마을 이주호(72)씨는 “우리마을 농업은 주로 수박, 고추, 생강, 마 등을 많이 하는 편이며, 축산을 장려하여 큰 축사 4동(4농가)에 소 300여 두를 기르고 있다”고 말했다.

▲ 김삼주 이장
▲ 지용원 노인회장

 

 

 

 

 

 

▲ 장영자 부녀회장
▲ 김석기 도림서당장

 

 

 

 

 

 

▲ 지용한 선생
▲ 권춘자 덕산고택 주손부인

 

 

 

 

 

 

▲ 김경동 어르신
▲ 곽옥순 할머니

 

 

 

 

 

 

▲ 이주호 씨
▲ 송기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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