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피난처 승문1리(막현)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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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55]문수면 승문1리(막현)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피난처 승문1리(막현)

2015. 04. 16 by 이원식 기자

▲ 막현마을전경과 마을표석
의령여씨와 단양우씨의 집성촌
합동세배의 원조(元祖) 막현마실

문수면 승문1리(막현) 가는 길
시내를 벗어나 남산고개를 넘어 안동방향으로 향한다. 농협파머스 앞을 지나서 문수로 가는 길은 중앙선 철로와 나란히 간다. 기찻길에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노란 개나릿길을 달리는 기차가 정겨워 보인다. 문수면사무소와 문수역을 지나 적동삼거리에서 무섬마을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 마을표석
서천둑방을 따라 1km 쯤 내려가면 길 왼쪽에 ‘예절의 고향 막현’이란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철도건널목을 건너면 '막현 500m'라고 새긴 표석이 또 나타난다.

닫힌 듯 열린 듯한 오름길로 굽이돌아 산모롱이를 하나 더 돌아서면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막현마을을 만나게 된다.

집들은 비스듬한 경사지에 옹기종기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지난 3일 오전 승문1리 막현마실에 갔다. 우병석 이장, 여해목 노인회장, 김명숙 부녀회장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역사와 내력을 들었다.

승문1리는 본마실[막현] 50호, 도랫마실 5호, 유천마실 20호 등 75호에 200여명이 산다. 농업이 발달하여 벼농사를 비롯한 수박, 고추, 약초를 많이 생산하는 마을이다.

▲ 도랫마실
기록으로 본 마을의 역사
승문1리 지역은 조선시대 때 영천군 적포리(면)에 속했다. 조선 후기에 쓰여 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문본 영주지(榮州誌) 괴헌고택본에 의하면 “적포리(赤布里) 속방(屬坊)은 여덟이다.

아천방(鵝川坊)[아치날], 황조동방(黃鳥洞坊), 자만방(자巒坊)[자만동], 한정방(閒井坊)[한쟁이], 종릉방(鍾陵坊), 초방방(草芳坊), 주론방(注論坊), 노평방(蘆坪坊)이다. 이 마을은 땅이 골짜기가 지고 토지가 척박하며 사족과 한량과 산관이 섞여 거주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추억의건널목
그 이후 1914년 일제(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적포면에 속해 있던 옛 지명을 없애고, 적동동, 적서동, 만방동, 승문동, 탄산동, 조제동으로 통폐합하여 문수면에 편입시켰다. 또한 영주시사(榮州市史)를 보면 “승문리는 승평동(繩坪洞) 일부와 석문동(石文洞)[막현]을 합하여 승문리(繩門里)라 했다”라고 적고 있다.

▲ 유천마실
그러면 막현(幕峴)이란 지명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구전에 의하면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막(幕)을 쳐 놓은 것 같다하여 막현(幕峴) 또는 ‘막지고개’라고 불렀으며 ‘돌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언제부터 ‘막현’이란 지명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막현 사람들은 벼슬하지 않고 영원히 숨어살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막현은 외부에서 보면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아 천혜의 피난처로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난을 피했다고 한다.

의령여씨 만석(晩錫)이 개척한 마을
의령여씨(宜寧余氏)는 백제국 왕가의 후예인 고려조 의춘군(宜春君) 여선재(余善才)의 후손이다. 의령여씨가 경남 의령에서 영주로 이주하여 진우(상망동)에 터를 잡은 것은 11세 원욱(元郁) 때이다.

14세 만석(晩錫, 通政大夫吏曹正郞)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모님을 모시고 안전한 피난처를 택해 숨어든 곳이 바로 막현이다.

막현 마을 위쪽에 있는 영모대(永慕臺)에는 후손들이 입향조 만석(晩錫) 선조를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 큰 바위에 만석 선조의 이름과 그의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의 이름을 1955년에 새겼다. 의령여씨가 임진왜란(1592년) 때 마을을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400년 넘게 세거해 온 유서 깊은 집성촌이다.

▲ 영모대
단양우씨 입향조는 계은(繼殷)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충북 단양이 본관이다. 시조 우현(禹玄)은 고려 광종 때 진사에 급제하여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역임하였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었다.

단양우씨 막현 종중에 의하면 “단양우씨 막현 입향조는 12세 계은(繼殷) 선조로 영주동(경찰서 좌측)에 살다가 막현으로 이주하여 입향조가 됐다”고 했다. 세보에 의하면 계은은 임진년생(1592)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다. 그가 장년이 되어 입향했다고 볼 때 1630-40년 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령여씨가 입향하고 수십년 후에 입향했다고 볼 때 단양우씨가 이 곳에 세거한지도 약 360년 이상일 것으로 보면 되겠다.

▲ 느티나무(동수목)
장군대좌형의 명당 터
풍수지리학적으로 막현은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소백의 정기는 서천을 기준으로 두 갈래의 지맥이 남으로 흐른다. 서천의 서쪽은 자구지맥이 흐르고 동쪽은 자개지맥이 흐른다.

자개지맥은 소백산 고치령에서 시작하여 자개봉, 천마산, 대마산, 유릉산으로 이어져 도래마을 앞 서천과 내성천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끝난다. 원래 지맥이 끝나는 지점에 혈(정기)이 왕성하기 때문에 명당자리가 많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중국의 풍수전략가 두사충을 대동하고 남하 하다가 죽령에 이르러 영천고을을 바라보니 저 멀리 서기(瑞氣)가 서려 있는 곳이 있어 그 곳을 찾아와 보니 바로 이곳(막현) 돌봉이었다고 한다. 이를 그냥두면 조선에 큰 인물이 태어난다 하여 돌봉의 혈맥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도 조선총독부가 이곳에서 큰 인물이 태어난다고 하여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다는 구전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 출신자 중 고시 합격생 등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한다.

▲ 골목길
합동세배의 원조(元祖) 막현
요즘 설 때 합동세배를 하는 장면이 TV에 소개되고 있다. 우리지역 합동세배의 원조는 “막현마실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1973년부터 합동세배가 시작되었으니 42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400여년간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아온 단양우씨와 의령여씨는 친목계를 결성하여 마을의 단합과 발전을 도모해 왔다.

▲ 우병석 이장
▲ 여해목 노인회장

그러다가 1973년 합동세배를 제안하여 그 때부터 정월 초이튿날 합동세배를 올리게 됐다. 회관이 없던 당시는 마당 큰집에 멍석을 깔고 합동세배를 올렸다. 이 행사는 연중 마을 행사 중 가장 큰 행사였고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대축제였다.

당시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던 해로 이와 같은 발상을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효심의 발로’라 할 수 있겠다. 90년대에 들어와 나라의 형편도 나아지고 농촌 형편도 좋아지게 되면서 회관 건립을 추진하게 된다. 마을 친목계가 주축이 되어 지역주민과 출향인 등 140여명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1993년 8월 15일 현재의 회관이 준공됐다.

▲ 김명숙 부녀회장
▲ 우병락 전 노인회장
이 또한 지역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마을회관으로 기록되고 있다. 마을 친목계는 2007년 문수면 발전협의회와 협력하여 문수의 영산인 유릉산 등산로를 개발해 지역민들의 건강을 다지는 한편 새해 소망을 비는 해맞이 공원을 만들었다. 매년 1월 1일이면 500여명이 참가하는 ‘해맞이 명소’가 됐다.

막현마실 사람들
막현에 갔던 날 텃밭에서 일하시는 여영선(84)·손점수(83)어르신 내외분을 만나면서 마을과 첫 인사를 나누게 됐다.

▲ 김재득 할머니
▲ 석우임 할머니

마을 회관 앞에서 우병기 전 이장과 우상기(73)씨, 여해출(64)씨를 만나 이 마을이 단양우씨와 의령여씨 집성촌이란 것을 알게 됐다. 마을회관에서 회관 건립기금 액자를 살펴 본 후 경로당 어르신들과 마주 앉았다.

▲ 이순자 할머니
▲ 우상기 어르신
김재득(81), 석우임(77), 이순자(76), 김용희(72) 어르신은 처음 만났지만 고향마을에서 이웃을 만난 듯 친절하고 따뜻했다. 어르신들은 “우리마을의 자랑 첫째는 합동세배이며, 효성이 지극한 마을”이라 면서 “행사 때마다 부녀회 등 젊은 사람들이 수고를 많이 한다”고 칭찬했다.

회관에서 나와 도랫마 여해목 노인회장을 댁으로 갔다. 의령여씨 세보를 펴 놓고 막현 입향조를 확인하고 입향연대를 따져봤다. 그리고 마을 뒤 영모대를 찾아갔다. 여 회장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입향조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글씨를 찾아 주셔서 선명한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다시 마을회관으로 내려오는 길에 우병락(80) 전 노인회장을 만나 단양우씨 입향조와 입향연대에 대한 기록을 살펴봤다. 일행은 600년 수령의 동수나무 아래에 섰다. 화재로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 때 우병석 이장 부인께서 차 한 잔을 내주셨다. 역사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나는 마을탐방이었다.

▲ 여해출 씨
▲ 우병기 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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