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충신백성 배순의 점방(대장간)이 있던 마을 “배점2리”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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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50] 순흥면 배점2리

충신백성 배순의 점방(대장간)이 있던 마을 “배점2리”

2015. 03. 12 by 이원식 기자

 

▲ 배점마을 전경

배순의 ‘배’자와 점방이란 ‘점’자를 따서 ‘배점’
이화동천(梨花洞天), 경치좋고 살기좋은 동네

순흥면 배점2리 가는 길

 

 

▲ 죽계구곡
영주시내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으로 간다. 순흥면사무소에서 소수서원 방향으로 200m 쯤 올라가면 죽계사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초암사, 국망봉 방향으로 직진한다. 비봉산자락을 S코스로 몇번 돌아 오르면 순흥(배점)저수지에 이르게 되고, 저수지 주변에는 한스빌(통나무주택단지), 산장과 펜션, 토속음식, 전통찻집 등이 즐비하다. 배점1리(하평,상평) 앞을 지나면 옛 배점초등학교와 삼괴정이 나타나고 배점 본 마을은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자리 잡았다.

 

배점2리에는 아름다운 죽계구곡이 있으며, 의상대사가 부석사 터를 찾을 때 초막을 지어 임시거처로 사용했다는 초암사도 있다. 또한 소백산자락길 제1자락의 시작도 배점부터이고, 12자락 마지막 종점도 배점이다.

 

▲ 죽계별곡 시비

지난 3일 오후 1시 경 배점마을로 갔다. 마을입구에서 김진환 이장에게 전화를 하니 “상평 고갯마루에 있는 과수원에서 전지(剪枝)를 하고 있다”고 했다. 상평마을을 지나 과수원길을 따라 올라가서 김 이장을 만났다. 김 이장은 “지금 배점리는 사과 전지가 한창”이라며 “소백산 국망봉 줄기에 있는 골짝마다 사과가 가득하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옛 사람들이 산전을 일구어 농사짓던 모든 땅에는 사과나무가 빼곡히 심겨져 있다.

 

▲ 배점마을 전경

마을의 역사
배점리 지역은 1414년(태종 14)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부 내죽면(內竹面)에 속했다. 세조 4년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풍기군으로 이속됐다가 숙종 10년(1683) 순흥부 복설로 환속됐다. 단곡(丹谷) 곽진(郭震, 1568~~1633)이 쓴 「단곡집」에 의하면 “배순은 죽계의 상류 평장동(平章洞) 어귀에 가게를 지어 놓고 풀무간 일로 업을 삼았다”라는 기록으로 봐서 ‘배점’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마을이름이 ‘평장동’이란 것을 알 수 있다.

1849(헌종 15년) 안정구(安廷球, 1803-1863)가 편집한 순흥읍지(자향지)를 보면 배점지역은 순흥부 내죽면에 속했으며, 당시 내죽면에는 성북(城北), 속수(涑水), 원촌(院村, 원단촌), 금성(金城, 향교), 옥계(玉溪, 유점), 광문(廣文, 너르기), 송림동(松林洞, 송여골), 덕현(德峴) 등이 있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영주군 순흥면 배점리가 되었다. 이후 인구 증가와 행정 편의를 위해 배점1,2리로 구분됐다. 현재 배점2리에는 45호에 100여명이 산다.

 

▲ 배순의 정려각

배점의 유래
배점은 원래 평장동이라 불렀는데 배순(1548-1610 행적기록이 있는 기간)의 학문과 충·효·덕행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1615년 정려각을 세우면서부터 배순(裵純)의 배(裵)자와 점방(店房)이란 점(店)자를 따서 배점(裵店)이라고 부르게 됐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3대왕 석탈해는 대장장이(철을 다루는 기술자)에서 왕이 됐으며, 죽은 뒤에는 토함산을 수호하는 신이 됐다고 한다. 배순은 대장장이에서 참된 학자로 이름을 남겼으며 죽어서는 마을의 수호신이 됐다.

배순의 대장간은 어디에 있나 
마을사람들은 “배순의 대장간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배순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옛 평장동 마을 어귀에 대장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마을 뒷산 중턱 개울가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배순의 대장간을 찾아 갔다. 비좁은 마을 안 골목길을 지나 시멘트 포장길로 500m 가량 산 중턱으로 올라가니 산비탈은 모두 과수원이다. 마을 어르신이 가르쳐 준 대장간 자리는 과수원 안쪽 도랑가였다. 대장간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그 자리에 원두막 한 채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100여m 쯤 떨어진 산 중턱에 배순의 묘가 있다. 2011년에 촛대석과 상석을 설치하고 거북 받침돌 위에 ‘충신백성배순지묘’라고 쓴 비석을 세웠다. 마을 사람들은 “옛 대장간 자리에 ‘초막 대장간’을 복원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배순의 묘와 배점마을

배순은 누구인가
배순(1534년생)은 장인(匠人)으로서 정성을 다하여 농기구를 만들었으며, 소수서원을 지을 때는 철물을 납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배순은 퇴계 선생이 소수서원에서 강학할 때 강학당 밖에서 몰래 듣고 공부했다.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퇴계 선생은 제자로 거두었고, 퇴계의 제자 309명을 수록한 「급문제현록」에 배순의 이름이 올라있다.

그는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3년 상복을 입었으며, 선조 임금 승하 때도 3년 상복을 입고 국망봉에 올라 도성을 향해 곡했다고 한다. 그는 성실한 생활인이었으며 장인이었다. 무엇보다 성리학의 핵심인 경(敬)사상을 실천한 참된 학자였으며, 충과 효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었다. 단곡 곽진은 배순정려비문에서 “참된 충과 참된 효는 오직 배순뿐이다(純忠純孝惟純耳)”고 썼다.

 

▲ 삼괴정

동신(洞神)이 된 배순
이 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배순을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 자시(子時, 23시-01시)에 삼괴정(三槐亭) 배순의 정려각에서 동제(洞祭)를 지낸다. 기자가 마을에 갔을 때 제관의 집과 도가(都家, 제수준비하는 집)에는 잡신을 쫓는 붉은 흙이 뿌려져 있고 대문에는 금줄이 쳐져있었다.

김진환 이장은 “을미년 동제 제관은 윤상석 배점1리 이장, 김진환 배점2리 이장, 김해년 새마을 지도자, 이진우 어르신 등으로 선정했으며, 그 외 집례자, 집사 등 여러 명이 있고 경주배씨 종친회에서도 다수 참제한다”고 말했다. 배순은 죽어서도 마을을 지키려는 듯 배점마을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 옛 배점초등학교

옛 배점초등학교
학교 운동장에 서니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 학교는 1940년 순흥심상소학교 부설 배점간이학교로 설립되어 1944년 4월 개교했다가 1945년 8월 폐교됐다.

1945년 9월 재설립되어 1950년 제1회 졸업생 12명을 배출했다. 그 후 1993년 44회까지 1천 26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3년 3월 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가 2008년 폐교됐다. 농촌 인구가 급증하던 1970년대 초에는 전교생 300명이 넘는 산촌학교였으며, 1985년 병설유치원 개원, 1986년 벽지학교로 지정 등 영주교육사에 기록을 남겼다.

배점마을 사람들 
배점 초입에 삼괴정(느티나무 3그루)이 있고 그 앞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다. 여기서 63년동안 살았다는 권옥희(82) 할머니는 “이 느티나무는 퇴계 선생께서 심은 나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배순의 정려비는 학교 안에 있던 것을 도로변으로 옮겼다가 다시 삼괴정으로 옴겨 왔다”고 말했다.

죽계구곡 이화동(九曲) 옆에서 냉이를 캐고 있는 신경자(72) 할머니께 “배순의 대장간이 어디에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배순의 대장간은 마을 뒤로 한참 올라가서 산중턱에 있다”고 알려 줬다. 마을 가운데 마을회관이 있다. 마을회관 앞에는 ‘이화동천(梨花洞天, 경치좋고 살기좋은 하늘동네)’이란 표석이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랑과 화합으로 인심좋고 살기좋은 우리마을 배점”이라고 새겨져 있다.

회관 마당에서 김영구(76) 어르신을 만났다. “회관에서 점심먹고 쉬었다가 사과 전지를 하러 가는 길인데, 5시 경이면 다시 모인다”고 하면서 차를 몰고 농장으로 향했다.
경로당 오르는 길을 찾던 중 류시일(57)씨와 우영심(52, 부녀회장) 씨를 만났다. 가랑비를 맞으며 그 집 마당에서 커피도 한 잔 했다. 류씨는 “40~50년 전에는 초가집뿐이었고 가난하게 살았다. 지금은 집집마다 10여마지기(약 3천평)씩 사과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권순택(72) 노인회 총무는 “마을회관은 2004년에 준공했고, 이층 죽계경로당은 2014년에 증축했다”고 하면서 “우리 경로당은 점심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으며, 서로 돕고 건강도 챙겨 주면서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경로당 안방에서 김임순(74), 박명자(69), 장성희(74) 할머니 등 여러분을 만났다. 1년 전 성황제 취재차 왔던 기자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주니 고마웠다. 할머니들은 “매일 세 사람씩 당번을 정해 식사 준비를 한다”면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 김진환 이장
▲ 권순택 노인회총무

 

 

 

 

 

 

 

▲ 우영심 부녀회장
▲ 권옥희 할머니

 

 

 

 

 

 

 

▲ 김영구 어르신
▲ 김임순 할머니

 

 

 

 

 

 

 

 

▲ 장성희 할머니

 

▲ 신경자 할머니

 

 

 

 

 

 

 

▲ 박명자 할머니
▲ 류시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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