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만석꾼 김부자가 살던 마을 ‘용암2리(화감)’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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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탐방[49] 부석면 용암2리

만석꾼 김부자가 살던 마을 ‘용암2리(화감)’

2015. 03. 04 by 이원식 기자

▲ 마을전경
연안김씨 집성촌, 영남 명문으로 명성 대단
99칸 기와집에 연당과 누각이 있던 마을

부석면 화감마을 가는 길

▲ 용암리 표석
영주시내에서 의상로(진우방향)를 따라 부석으로 간다. 부석교차로에서 봉화방향으로 2~3분정도 가다보면 망감마을이 나오고 이어서 우측에 용암1,2리(새두들, 용암, 화감, 새마)로 가는 안내표석을 따라 간다. 승용차 교행이 어려울 정도의 좁은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으면 새두들과 용암이고, 조금 더 내려가면 화감마을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바위 글씨가 여러 군데 보이고 사과의 고장답게 골짜기마다 언덕마다 사과나무가 빼곡히 심겨져 있다. 이 마을은 연안김씨 집성촌이기도 하고 만석꾼 김부자가 살던 마을로 마을 앞산의 이름이 노적봉이다. 지난 22일과 24일 화감마을에 갔다. 김무기(62) 이장, 김신영(73) 노인회장, 남봉화(62) 부녀회장 등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마을의 역사와 내력을 듣고 왔다.

▲ 화부지형
마을의 유래
화감마을은 주변이 화부지형(花釜之形)으로 산봉오리들이 모두 마을을 향하고 있다. 마을이 자리 잡은 곳이 부근 지면보다 낮아 꽃봉오리 속(꽃술) 같이 보이기도 하고, 가마 모양 같이 보이기도 하여 꽃 화(花)자에 가마 부(釜)자를 써서 화부동(花釜洞)이라고 불렀다. 즉 화부동은 가마솥 모양의 꽃봉오리 안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순흥읍지(자향지, 1849년 편집)에 보면 화부(花釜)와 용암(龍巖)이라는 지명은 나타나 있으나 화감이란 지명은 없다. 화감(花甘)이란 지명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일제가 우리의 전통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창지개명(創地改名)할 때 화부를 화감으로 개칭한 것은 아닌지 추정해 볼 수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 마을앞산 노적봉
마을의 역사
화감 지역은 1414년(태종 14) 군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순흥부 이부석면에 속했다. 세조 3년 순흥부가 폐부될 때 영천군으로 이속되었다가 숙종 때 순흥부 복설로 환속되었으며, 이부석면에는 감곡, 성남, 감산, 고산, 구석, 화부, 용암 등이 있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이부석면과 도강면(도탄, 보계, 영모암)을 통합하여 부석면이라 칭하고 화감은 용암리에 편입시켰다. 용암리에는 화감, 용암, 새두들, 망감, 새마 등이 있다. 이후 인구 증가와 행정 편의를 위해 용암1,2리로 구분되었으며 용암2리에는 화감과 새마가 있다.

연안김씨 좌군사정공파 집성촌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감 사문박사를 지내신 김섬한(金暹漢, 박사공)공이 연안김씨의 시조이다. 시조(始祖)의 7대손인 8세(世) 22분을 기준으로 하여 22파의 파명을 정하였는데 좌군사정공파의 파조는 진용부위좌군사정(進勇副尉左軍司正)을 지낸 김구(金俱)이다. 김구의 아들 김세형(金世衡)이 세조 2년 사육신 사건 때 낙향하여 영천(영주) 두암(이산면 신암리)에 터를 잡으면서 영주 입향조가 됐다. 연안김씨 일족이 순흥부 화감에 정착한 것은 김세형의 증손인 김팔국의 후손들이다.

화감마을 연안김씨 후손들은 “김팔국(12대) 선조는 만취당 김개국(1548-1603)의 동생으로 두암에서 이산면 내매로 살림을 났다. 지금도 내매에 선조들의 묘소가 여럿 있다”고 했다. 김팔국(金八國)은 관상감 참봉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여혼(汝혼)이 통정대부 부호군, 손자 운창(雲昌)이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연안김씨 파조 소개 문헌에 의하면 “운창의 후손들이 부석 화감를 세거지로 하여 이산종중과 더불어 영남의 명문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고 소개하고 있다. [문헌에는 팔국의 후손을 부석종중이라 하고 있으며 부석 세거 400년이라고 기록됨] 현재 화감 후손들은 “19대 재광(載光, 1791-1836) 선조께서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에 먼저 정착하시고, 이어서 친척들이 이곳으로 옮겨왔다”며 “화감에 세거한지 200여년 됐다”고 말했다.

▲ 지암 고택
쓰러지는 종갓집
마을 가운데 위치한 지암종택은 고종 때 궁내부주사를 거쳐 중추원의관을 지낸 지암(止巖) 김규수(金圭秀) 선생이 약 150여년전에 건립한 가옥이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6칸 반 규모로 큰 편이다. 본채 외에 지암 후손들의 살림집이 5-6채, 사당, 하인들이 거처하는 행랑채, 10칸이 넘는 곳간 등 99칸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송인덕(91), 송갑현(86) 할머니는 “대문만 하더라도 큰대문이 있고 그 옆에 솟을 대문이 있었으며, 안채로 들어가려면 12대문을 지나야 했다”면서 “섣달 그믐날이면 사당에 가서 묵은세배를 올리고 종부에게도 세배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화려했던 지암종택의 현재 모습은 보기가 민망하고 안타깝다. 문화재 지정도 안 되고 관리하는 후손도 없어 완전히 무너질 날만 기다리고 있다.

▲ 옛 연당자리
만석꾼 김규수는 어떤 사람인가?
김규수(1865-1933)의 자는 화일(華一)이며 호는 지암(止巖)이다. 그는 18세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902년 천거로 궁내부주사로 나아갔으며, 1906년 중추원의관에 올랐으나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나아가지 않았다.

나라를 잃자 문을 닫고 자취를 숨겨 글을 읽고 임천을 거닐며 울화를 달랬다고 전해진다. 그는 1923년 강산 순례길에 올라 금강산, 개성, 평양, 만주, 안동현까지 답사하고 기행시문을 남겼다. 1926년 지역이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자신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지역 사람들을 구제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세금을 도맡아 내어주었다. 이에 지역사람들은 그의 고마운 마음을 길이 알리고자 공덕비를 세우려하자 그가 반대하여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만석꾼, 어느 정도 부자였을까?
이 마을 원로 김충기(81) 어르신과 전직 동장을 역임한 김사완(69), 김화기(67)씨와 마을을 한 바퀴 둘러봤다. 이분들은 “화가메(화감) 김부자는 경주 최부자 다음가는 큰부자로 김규수 때 절정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화감을 중심으로 사방 30리 안의 토지는 모두 김부자네 땅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또 “가을이 되면 도지(소작료)행렬이 이어졌고 산삼, 꿀, 해물, 비단 등 귀한 물품들이 바리바리 들어왔다”고 했다.

당시 양곡창고도 이곳 외에 물야, 춘양, 순흥 등지에 분산돼 있었으며 논 한 마지기에 쌀 1가마를 도지로 받았는데 1년에 7천 가마 이상 들어왔다고 하니 대단한 부자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암의 손자(만기)가 일본에서 유학(게이오대학)할 때 한 달에 소 세 마리 값이 학비로 보내졌고, 그가 유학을 마치고 경북도청에 근무할 때 도지사도 탈 수 없었던 자가용 승용차를 따고 다녔을 정도로 부자였다”고 하면서 “1920년대 지암이 금강산에 정자를 짓고 시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또한 마을 앞에는 서마지기(1천평) 가량 되는 연당(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 안압지를 축소해 놓은 듯한 이 연못은 못 안에 섬이 있고 배도 한 척 있었으며, 언덕에는 정자가 있고 못 안에는 여택재(麗澤齋)라는 누각이 있어 경치가 볼만했다고 한다. 특히 연못 안 누각으로 들어가는 나무다리는 지붕이 화려한 다리였다고 하니 당시 재력(財力)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부석, 수식 학생들이 이곳으로 소풍을 왔을 정도로 이름다운 연못이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연당을 지키지 못함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 100년 고택
화목하게 살아가는 화감 사람들
지난달 22일 오후 마을 이장댁에서 김무기 이장, 전순조(60) 이장부인, 전씨의 동서 유춘란(59)·김근희(56)씨, 이장 동생 김용기(57)씨 등과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 이장은 “용암2리는 56호에 110명이 살고 있으며, 주력 농업은 사과”라고 했다. 전순조씨는 “마을이 모두 집안이기 때문에 형님이고 동서고 아재”라며 “양반가 전통을 이어받아 자녀 교육에 힘쓰면서 서로돕고 정나누기 하면서 화목하게 산다”고 말했다.

마을 중심에 회관이 있다. 1995년 마을 자력으로 회관을 건립했으나 지금은 낡고 비좁아 시(市)의 지원을 받아 새로 짓는 중이다. 24일 오후 회관에서 김신영(73) 노인회장과 박규수(69) 총무를 만났다. 김 회장은 “노인회원 30명 중 20여명은 노인회관에 모여 점심도 같이 먹고, 운동도 같이 한다”면서 “남봉화 부녀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어르신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있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인심 좋은 마을 어르신들은 “올 봄 마을회관 준공식 때 꼭 오라”고 하면서 배웅해 주었다.

▲ 김신영 노인회장
▲ 김무기 이장

 

 

 

 

 

 

▲ 박규수 노인회총무
▲ 남봉화 부녀회장

 

 

 

 

 

 

▲ 송갑현 할머니
▲ 송인덕 할머니

 

 

 

 

 

 

▲ 김사완 씨
▲ 김충기 어르신

 

 

 

 

 

 

▲ 김근희 씨
▲ 김화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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