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내성천을 울타리로 둔 석포1리 ‘번계(樊溪)마을’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탐방[47]이산면 석포1리(번계)

내성천을 울타리로 둔 석포1리 ‘번계(樊溪)마을’

2015. 02. 12 by 이원식 기자

▲ 번계마을 전경
400년 전 번계공이 개척한 선성김씨 집성촌
흑석의 석(石)자와 반포의 포(浦)자 따 ‘石浦里’

이산면 석포1리(번계) 가는 길
영주시내 원당로에서 이산로를 따라 이산면 방향으로 향한다. 영주고등학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돗밤실을 지나 흑석고개를 넘어 내려가다 보면 이산초등학교가 나온다. 신안삼거리를 지나 내성천(석포교) 다리를 건너면 석포1리 번계마을이다. 번계는 천운정을 중심으로 모정, 야일당, 동상골, 서낭대이, 소바우 등 여섯 마을들로 구성돼 있다.

마을 뒤에는 바람을 막아 줄 야트막한 산이 있고 야산에는 송림이 울창하다. 산에서 내려다 본 번계들은 풍요로움이 넘실거리고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내성천은 풍류와 여유를 선사한다.

지난 1일 번계를 찾았다. 석포1리 경로당에서 마을 어르신 여러분들을 만나 옛 번계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김정걸 이장은 객토 현장에서 만났고 김종섭 노인회장은 소바우 자택에서 만났다.

마을의 역사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는 조선시대 때 영천군 말암면 지역이었다. 영주지 괴헌고택본에 의하면 말암리는 ‘흑석(흑석사 주변)과 이곡(이르실)과 우금과 반포(동포, 번계)와 지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번계의 옛 이름이 ‘반포’로 기록된 것은 백암 선생이 내성천을 영천의 동쪽에 흐르는 하천이라 하여 동포(東浦)라고 불렀는데 백암 선생의 아들 번계공이 동천(지금 내성천)을 돌려 치수(治水)함으로써 개(浦)를 돌렸다 하여 반포(反浦)라는 지명이 생겼다.

지금의 ‘석포’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흑석의 석(石)자와 반포의 포(浦)자를 따서 ‘석포리(石浦里)’라 하고 이산면에 편입시켰다.

▲ 야일당과 번계들
번계마을의 유래
번계마을은 민절공(敏節公) 백암(栢巖) 김륵(金륵, 1540~1616)의 둘째 아들 번계(樊溪) 김지선(金止善, 1573~1622)에 의해 마을이 개척되면서 번계마을이 형성됐다.

번계공(樊溪公)은 이곳에 터를 잡은 후 소바우 앞으로 마을을 휘감아 흐르던 내성천 줄기를 서쪽으로 멀리 밀어 내고 마을 앞을 모두 농토로 일구어 냈다. 넓고 기름진 농토를 얻은 마을 사람들은 번계공의 공덕(功德)에 감사하면서 공의 호를 따 마을 이름을 ‘번계’로 삼았다.

번계는 수려한 구릉에 안겨 있고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그 뒤로는 내성천이 흐르고 멀리는 그림 같은 야산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번계공은 1601년(선조 34)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고, 1604년 의금부도사에 올라 벼슬이 중직대부(中直大夫)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이산서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이산서원 명륜당을 중건했다. 그는 퇴계 이황의 후손 손주사위이기도 하다.

▲ 동포성황신
여섯 개의 마을이 모인 석포1리(번계)
▲번계마을은 백암 김륵 선생의 만년 은거지로 삼은 곳이며, 영주 동쪽에 흐르는 하천이라 하여 ‘동포’라고 불렀다. 김륵의 차자인 번계 김지선이 농토를 확장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한 후 마을 사람들이 번계공의 호를 따서 번계마을이라 불렀다. 지금도 마을의 성황신은 ‘동포성황신(東浦城隍神)’으로 모시고 있다.

▲ 야일당
▲야일당 마을은 배가 닿는 선착장이 있었다는 전설로 백경지로 불렸는데, 1650년 야일공 김란(번계공의 넷째아들)이 야일당을 세우면서 당호를 따서 야일당마을이라고 부른다.

▲ 소바우
▲소바우(素岩)는 야일당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입구에 소 모양의 백색 거암이 있다 하여 힐 소(素)자를 써서 ‘소바우’라 하기도 하고 소모양이라 하여 ‘소바우’라 부르기도 한다. 소바우에는 창녕서씨와 연안김씨가 살고 있다.

▲ 동상골
▲동상골은 번계마을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은 산자락 아래 넷집이 살고 있다.

▲서낭대이는 지곡천 건너 달봉산 정상부근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해서 서낭대이라는 마을이 생겼다. 지금은 대여섯집이 살고 있다. 서낭당은 최근 모정쉼터로 옮겨왔다.

▲모정은 우체국과 방앗간이 있는 마을이다. 조선 초기 양성이씨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현 우체국 뒤쪽에 ‘모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마을 앞 솔숲에 모정쉼터를 세워 옛 흔적을 기념하고 있다.

▲ 천운정
고즈넉한 정자 천운정
천운정은 백암 선생의 만년 은거지로 야트막한 야산 아래에 고즈넉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 앞에는 자그마한 연당(蓮塘)이 있어서 정자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으며, 그 앞으로 제법 넓은 들이 있어 풍요를 더해 준다.

현재 이 정자 앞으로는 제법 높은 제방이 생겼고 그 제방 위로 도로가 나는 바람에 내성천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천운정’이란 이름에 대해 향토사학자들은 남송대 성리학자인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의 제 2구인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天光雲影共徘徊]”란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고 있다. 천운정 우측에는 口자형 살림집인 양진재가 자리하고 있다.

▲ 양진재
양진재를 그리워하는 백암의 시(詩)
천운정 마당에는 백암 김륵이 1602년 명나라에 갔을 때 양진재(養眞齋)를 잊지 못해 쓴 시가 있다. 한시(漢詩) 비문 아래 번역문이 있어 누구나 감상하기 쉽도록 했다.

“만리 관문을 꿈결같이 지나 옥화관에 도착하고 보니 양진재의 근황은 지금 어떠할고, 멀리서 생각하니 얼어붙은 눈 쓸 사람 없이 텅 빈 뜰에는 달빛만이 머물러 있겠지”

▲ 백암 선생 시
「백암 선생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옥화관에서 지은 시」

내 고향 번계마을
번계 출신 김영민씨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영주시내 거치고 원리고개 오르고, 돗밤실재도 넘어 흑석을 거쳐서 이산학교 앞을 지난다. 내성천 큰물 건너 우체국 왼편으론 우금을 가고, 모정 방앗간 끼고 돌면 안치라미 고고한 천운정이 있다. 야트막한 오르막 올라서 내려다보면, 큰들 앞에 두고 박봉산을 바라본다. 먹을 것 그다지 넉넉지 않아도, 선비선비 최고선비 백암 후손 삶의 터전, 착하고 어진 사람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곳, 백로떼 날던 자리 흰 구름 가이없고, 야일당 앞 외롭게 선 아름드리 느티나무, 오고 가는 세월 저 혼자 지키고 있네. 야들아 야들아 다 어데 갔노, 아제요 아지매요 다 어데 가셨니껴, 할배요 할매요 아랫목에 앉으셔서 옛날 얘기 좀 들어 보시더, 생시인들 우에 잊고 꿈엔들 우째 잊을 리껴”라는 시를 썼다.

번계 사람들
번계들은 요즘 객토사업이 한창이다. 소바우재 넘어 객토현장에서 김정걸 이장을 만났다.

김 이장은 “석포1리는 현재 72호에 120여명이 살고 있으며, 수도작(벼농사)을 중심으로 한우, 고추, 수박, 생강, 콩, 깨 등을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번계는 마을이 열린 후 400년동안 선성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천운정 종손 김종환(金宗煥) 선생은 “번계 후손들이 1970년대까지 100여호 가까이 살았으나 지금은 도시로 떠나고 50여호만 살고 있다”고 했다. 모정 쉼터에서 만난 김명환(75), 금복현(79) 어르신은 “번계들은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편안한 일터”라며 “지금부터 농사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석포1리 경로당에서 장정수(79), 강신숙(86), 이정규(85), 금순자(74), 홍순녀(80), 김유진(88)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들은 “스무살 남짓한 나이에 이곳으로 시집와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어렵게 살았지만 자식들 공부시키고 훌륭하게 키우는 일을 제일 중요시 했다”고 하면서 “지금은 잘 사는 나라가 되고 나라에서 많은 지원을 해 주어서 호강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김유진(88) 할머니는 “번계마을은 지난주(1월 31일) TBC 싱싱고향별곡(한기웅,단비)에서 6개 마을을 소개하고, 마을회관에서 할배할매 노래자랑도 열었다”고 말했다. 

▲ 김종섭 노인회장
▲ 김정걸 이장

 

 

 

 

 

 

▲ 강신숙 할머니
▲ 김유진 할머니

 

 

 

 

 

 

▲ 홍순녀 할머니
▲ 이정규 할머니

 

 

 

 

 

 

▲ 금복현 어르신
▲ 장정수 할머니

 

 

 

 

 

 

▲ 금순자 할머니
▲ 김명환 어르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