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영주에서 가장 큰 농촌마을 충주석씨 집성촌 ‘평은리’ < 우리마을 탐방 < 영주 톺아보기 < 큐레이션기사 - 영주시민신문

상단영역

뉴스Q

기사검색

본문영역

우리마을 탐방

우리마을 탐방[46]평은면 평은리

영주에서 가장 큰 농촌마을 충주석씨 집성촌 ‘평은리’

2015. 02. 06 by 이원식 기자

▲ 평은리 전경
500년 전 충주석씨 사성(斯成)이 입향조
현재도 139가구에 400명이 사는 큰 마을

▲ 평은리 표석
평은면 평은리 가는 길
시내에서 남산육교네거리를 지나 농협파머스마켓 방향으로 가다. 적서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다리 밑을 통과하자마자 좌회전하여 자동차전용도로(경북대로) 안동방향으로 진입한다.

문수교차로와 운문교차로를 지나 높고 긴 다리 내성천교를 건너면 곧바로 평은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우측으로 내려서 좌회전하면 높이 4m가량 되는 ‘愛鄕 평은리’ 표석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500여m 쯤 올라가면 왼쪽으로 평은초등학교가 보이고 이어서 평은리 본 마을이 나타난다.

지난 19일 오후 평은리경로당에서 석승환 이장, 강치원 노인회장, 석정환 노인회총무, 조영숙 부녀회장 등 여러분들을 만나 평은리의 내력과 근대사 이야기를 들었다.

평은리의 유래
평은리는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 강동, 천본, 오운, 지곡과 함께 영천군 천상면에 속했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천상면과 진혈면(금광, 놋점, 송평[소드리], 섬계[무섬])을 통합하여 평은면으로 개칭하고 평은리에 면사무소를 두었다.

이 마을 강도구(92) 어르신은 “당시 평은교회 자리에 평은면사무소를 설치하였으나 마을 원로들이 마을의 개방을 두려워하고 일제에 항거하는 뜻에서 면사무소 설치를 반대했었다”며 “그 때 금광리에서는 면소재지 유치를 희망하여 금광리로 이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치원(80) 노인회장은 “평은(平恩)은 ‘평화롭고 은혜로운 땅’이라고 전해지고 있다”며 “조선시대 때는 말을 갈아타는 역(驛)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인근 지역에 창보역[창진], 옹천역, 도심역[봉화], 유동역[감천] 등이 있었다고 하며, 평은리는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큰 마을이었다”고 했다.

▲ 방앗간
평은리의 형성
평은리는 내성천 건너 영지산(504m, 평은의 진산) 중턱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옛적에 군마(軍馬)가 다니는 대로에서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고 안쪽은 넓어 일개 씨족이 자급자족하면서 공동생활을 하기에 적당한 지형이다.

조선 왕조 건국 때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 하여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보고 불의에 항거한 선비들이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숨어들던 곳이 바로 이런 곳이다.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이 개척될 당시에는 인동장씨가 살았고, 그 후 충주석씨들이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장씨, 강씨, 권씨 등 여러 성씨들이 살고 있다.

▲ 큰샘
충주석씨 집성촌
평은리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큰 마을이지만 마을의 유래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평은면 지명유래에는 ‘태종13년(1413) 충주석씨 석여명이 마을 개척했다’라고 되어 있으나 석여명은 평은과 관련이 없고 그 후손 사성(斯成)이 입향조인 것으로 확인됐다.

평은리 후손들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충주석씨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의종 때 랑장(郞將)으로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란을 평정한 공으로 상장군이 됐다. 서북병마사를 지냈으며 충주부원군에 봉해졌다. 석씨가 가문의 세력을 키운 것은 7세조인 석천을(石天乙)과 그의 아들 석수명(石壽明)과 석여명(石汝明) 때 이다. 첫째 아들 석수명(石壽明)의 후손들은 본관을 홍주(북한)로 하였고, 둘째 아들 석여명의 후손은 본관을 충주로 하였다」 라는 기록으로 볼 때 석여명의 후손들이 평은리에 이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평은리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충주석씨 평은 입향조는 사성(斯成) 선조이며, 입향 시기는 1450년 경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충주석씨 종친회에서 제공한 자료을 보면 “사성은 통덕낭(通德郎)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후손들은 평은(平恩)을 중심으로 망월(望月), 상주, 예천 등에 주로 살고 있다. 통덕낭공파(通德郎公派)는 모두 사성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평은리에는 25, 26, 27대손들이 살고 있다.

▲ 평은교회
마을 구경하기
이 마을 출신 석은숙(영주시 영주동)씨는 ‘내고향 평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린 영주시 평은면 평은리라는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 대부분 석씨들이 사는 집성촌이었으니 모두가 집안인 셈이다. 시골 마을 치고는 300호가 넘게 살았던 엄청 큰 동네였으니 과연 평은 본 동네라 할만하다. 어느 시골 동네가 단 하나의 마을에 학교가 있단 말인가. 당시 마을에 초등학생이 200명이 넘었으니 마을은 늘 시끌벅적했다”고 했다.

평은리는 영지산이 양팔을 벌려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또한 영지산은 깊은 골짜기를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초가집만 옹기종기 모여 살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현대식 양옥집으로 모두 변했다. 돌담길이던 마을길은 포장이 되어 도시 변두리 지역 같은 느낌을 준다.

아직 마을 곳곳에는 70년대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녹쓴 양철지붕 방앗간은 아직도 쌀을 찧는다고 하며, 언덕빼기에 있는 초가삼간 옛 집에는 지게, 탈곡기, 똥장군, 농기구, 가마솥 등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누애치기가 한창일 때 사용했던 잠실의 모습도 남아있고 잎담배를 건조하던 2층벽돌집도 힘들게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

▲ 평은초등학교
학교와 면사무소가 돌아왔다
1964년 평은리 아이들은 4Km 이상 걸어서 내명학교에 다녔다. 당시 평은교회 이정선 목사의 주선으로 학교 설립이 추진됐다. 이장 석중집, 장로 문수식, 석기운 등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문중의 문토를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1964년 11월 9일 사립학교 인가를 받아 1965년 3월 3일 영은사립학교로 개교(초대 교장 석승원)하여 235명으로 6학급을 편성했다. 1966년에서 1968년까지 사립학교로 운영하다가 재정난으로 1968년 3월 공립학교로 개편되면서 영은국민학교로 개칭됐다. 1994년까지 제29회에 걸쳐 졸업생 752명을 배출하고 평은초등학교 영은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가 1995.3.1 폐교됐다.

그로부터 20년 후 영주댐 건설에 따른 수몰로 금광리에 있던 평은초등학교가 2013년 12월 평은리로 이전해 왔다. 또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평은리에 면사무소를 두었다가 금광리로 이전한 후 100년만에 평은면사무소가 평은리로 돌아오게 됐다.

▲ 평은리 경로당
평은리 사람들
석승환(60) 이장은 “지금도 평은리에는 139호에 400여명이 살고 있다”며 “60-70년대에는 300가구가 넘었다고 하니 2천여 명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아마도 영주에서는 가장 큰 농촌마을”이라고 말했다. 조영숙(58) 부녀회장은 “우리마을은 참 밝고 깨끗한 마을”이라며 “축사나 양계 등 오염과 악취의 근원이 되는 시설이 전혀 없는 청정마을”이라고 했다.

석정환(75) 노인회 총무는 “충주석씨의 입향조는 11세손 사성(斯成) 선조이며 입향 시기는 1450년경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면서 “충주석씨는 학문을 중요시 하였지만 벼슬길로 나가지 않고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고 했다.

강형수(92) 어르신은 “평은리는 70세 이상 노인이 101명으로 마을 대부분이 노인들”이라며 “80% 이상이 사과농사를 짓고 있고 생강, 도라지, 버섯, 약초 등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했다.

권병하(83) 어르신은 “6,25 전(1948년 경) 빨갱이(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이 심해지자 마을 청년들은 성을 쌓고 창을 만들어 밤낮으로 마을을 지켰다”면서 “우리마을은 반공, 애국심으로 뭉친 마을이다. 마을을 지킨 공로로 훈장을 받아야 할 마을”이라고 자랑했다.

경로당 안방에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이 피어난다. 석영희(88), 강명숙(88), 전경란(87), 강금순(84) 할머니는 60년 전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 마을로 시집 올 때 가마타고 외나무다리 건너 왔었다”면서 “1970년대 중반 콘크리트 다리(평은리교)가 놓이기 전에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녔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또“6,25 때 청도까지 피난 갔다 돌아오니 마을이 모두 불타버려 울면서 토담집을 다시 지었다”고 했다. 이분선(73) 할머니는 “시집와 큰샘에서 물을 이고 집으로 오는데 골목이 하도 복잡해서 한참동안 길을 헤매다 집을 찾을 정도로 집이 많았다”고 말했다.

▲ 강치원 노인회장
▲ 석승환 이장

 

 

 

 

 

 

▲ 강도구 어르신
▲ 조영숙 부녀회장

 

 

 

 

 

 

▲ 석영희 할머니
▲ 강형수 어르신

 

 

 

 

 

 

▲ 전정란 할머니
▲ 강명숙 할머니

 

 

 

 

 

 

▲ 석정환 노인회 총무
▲ 권병하 어르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