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섬은 풍기 희여골 출신으로 대사성, 부제학, 대사헌 역임
비문 남태저(한성부우윤) 짓고, 글씨 강세황(서화가) 쓰다

황섬 신도비 보호각
황섬 신도비 보호각
보호각 안의 신도비
보호각 안의 신도비
신도비 가까이 보기
신도비 가까이 보기
황섬이 후학을 가르치던 수락당
황섬이 후학을 가르치던 수락당

신도(神道)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한다.

신도비(神道碑)란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된 사람에 대해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했다.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82-1(거묵골, 여우생태관찰원 인근) 소재 식암 황섬 신도비(息庵 黃暹 神道碑)’20201126일 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이 비석은 식암 황섬(1544-1616)이 세상을 떠난 지 159년 뒤인 1775(영조51)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데 귀부(龜趺, 거북받침돌), (), 가첨석(加檐 石, 지붕돌)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높이 162, 너비 89, 25.5의 크기이며, 비문은 남태저(南泰著, 한성부우윤)가 짓고 두전과 비문의 글씨는 강세황(姜世晃, 조선문신, 서화가)이 썼다. 비문은 해서체로 되어 있으나 아랫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이 비석은 비록 박락(剝落)된 부분이 많지만 강세황의 글씨로 새겨진 보기 드문 형태의 신도비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로 지정됐다.

식암 황섬은 누구인가?
황섬은 1544년 풍기읍 백1(희여골)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명(景明)이고, 호는 식암(息庵)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어려서부터 사리에 밝게 통달하고 뛰어나서 큰 그릇이 될 도량과 소질이 있었다. 명종 19(1564)에 생원에 합격하고, 명종 22(1567)에 어머니 정부인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선조 3(1570) 명경 갑과에 급제하여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제수받고 해운판관(海運判官), 형조·호조·예조랑(), 황해도사(黃海都事),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역임했다. 이후 도승지, 병조참의, 대사성, 부제학, 대사간 등 조정의 요직을 역임하고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낙향하여 희여골에서 일생을 지냈다.

황섬의 고향 희여골에는 그가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던 수락당이란 학당이 있다. 이름의 뜻은 광해군이 왕이 되자 고향으로 내려온 황섬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목숨만 온전히 돌아왔다는 유래를 따 목숨 수()와 벼슬을 떠나 시골에서 추수의 풍족함을 기다리는 것이 즐겁다는 즐거울 락()을 합친 것이다. 수락당(壽樂堂)2020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바 있다.

식암(息庵) 황섬(黃暹)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原文 公諱暹字景明號息庵黃氏貫昌原麗代有諱石柱起家爲大相自是世襲冠冕入我朝有諱貴卿贈戶 曹判書諱希聖贈贊成諱士祐文科兼吏判號慵 軒卽公高曾祖三世也-中略-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南泰著撰

역문 공의 이름은 섬이요, 자는 경명이며, 호는 식암이다. 황씨의 관향은 창원이요, 고려 때 석주가 벼슬에 올라 입신출세하여 대상이 되었다. 이로부터 고위 고관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귀경이 호조참의에 증직되고 희성이 찬성에 증직되고, 사우가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를 겸임했는데 호는 용헌이라 하니 곧 이분들은 공의 고조부, 증조부 조부 3세이다.  -중략-

가선대부 품계로 사헌부대사헌인 남태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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