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식의 정도전 이야기 [190] 삼봉집 속으로 고전 여행(38)

讀東亭陶詩後序(염흥방의 도연명의 시 후서를 읽고)-(2)

2025-11-21     이원식 기자

<지난 호에서 이어집니다.>

동정(염흥방의 호) 선생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도연명은 말세에 태어나서 그 시대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서 높이 벗어나고 멀리 물러나서 횡목 하나만 문으로 삼은 초가집에서 참 본성을 길렀소. 높은 벼슬을 티끌처럼 보고 많은 녹봉도 푼돈으로 여겼으며, 의식이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유연하게 즐겨서 근심을 잊었던 것이라오.

그 후 조국이 멸망하고 세대가 바뀌자 당대의 뛰어난 무리가 초빙되어 벼슬길에 나갔지만, 우리 도연명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았소. 본래의 왕조를 연모하는 마음이 맑은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두 성씨를 섬기지 않았고 시와 술 가운데 숨었으니, 그 높은 풍모와 준엄한 절개는 늠름한 가을서리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소.

그 시에 이르러서는, 근심스런 일을 당하면 근심의 시를 짓고 기쁜 일을 당하면 기쁨의 시를 지었으며, 술 마시는 일을 마주하면 술 마시는 시를 지었소.

그의 시에 ‘긴긴 여름날 배고픔 안고 있고, 추운 겨울밤 이불 없이 잠을 자네’라고 하였으니, 춥고 배고픈 고통이 어떠했겠소? ‘동쪽 마루 아래에서 호방하게 휘파람 부나니, 다시금 삶의 즐거움을 알았도다’라고 하였으니,

그 유연한 즐거움은 또 어떠하였겠소? ‘수수를 찧어서 좋은 술을 빚고, 술 익으면 나 혼자 따라 마시네’라 하고, ‘아침에 인의를 행하면 저녁에 죽는다 해도 다시 무엇을 구하리’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술에 취해 멍멍한 가운데서도 초연한 절개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소.

도연명의 즐거움은 춥고 배고픔의 밖에 있지 않았으며, 그 절개 역시 술에 취해 멍멍한 그 가운데 있었던 것이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소? 도연명이 많은 녹봉을 의롭지 않다 여기고 전원을 달게 여긴 것은 춥고 배고픔이 곧 즐거움인 줄 알았기 때문이오. 그리고 누룩에 의탁해서 지조를 끝까지 취하여 멍멍한 것이 곧 절개임을 알았기 때문이오. 그러니 안과 밖을 달리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잘 알겠습니다” 나는 물러나와 이 글을 쓴다.

[해설] 염흥방(?∼1388)의 「도연명의 시 후서(陶詩後序)」를 읽고 쓴 독후감이다. 정도전은 염흥방을 위해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정도전이 염흥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회진현에 유배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그가 유배 길에 개경의 동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염흥방이 배상도를 보내, “내가 시중에게 말해서 노여움이 조금 풀렸으니 잠깐 기다리시오”라고 전하였다.

정도전은 분명히 말하기를, “나의 말이나 시중의 노여움은 각자 나라를 위해 견해를 고집한 것이오. 지금 왕명이 있거늘 어찌 공의 말로 그치게 할 수 있단 말이오?”하고는 말에 올랐다.

이인임 등은 이 말을 듣고 정도전이 마음을 고치지 않았다고 분노하여 사람을 보내 매를 치려고 했다가 마침 ‘석기(釋器)의 난’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1376년(우왕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