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社說)] 480년 전통의 울림 「소수서원지(계묘본)」이 다시 깨어나다

2025-11-21     영주시민신문

서원이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정신과 가치의 요람이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서원의 정신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집념이 한 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났다.

「소수서원지(계묘본)」 발간은 단지 한 권의 책이 더 나왔다는 사실로 그칠 수 없다. 이는 1544년 「죽계지」, 2007년 「정해본」에 이어 480여 년의 전통과 현재를 잇는, 우리 시대의 ‘기록문화’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선언이다.

이번 「소수서원지」의 발간은 10여 년에 걸친 유림과 학계, 지역사회의 집단 지성의 결정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단절되기 쉬운 전통의 맥을, 오히려 해설 중심이라는 현대적 형식을 빌려 되살렸다. 과거를 단지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언어로 ‘설명’하며 독자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서원지의 장벽을 낮추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공공의 기록’으로 변모시킨 점은 그 자체로 창의적이다.

책의 구성도 탁월하다. 서원의 창건 배경과 배향 인물, 건축과 의례, 문화재와 조직운영, 현대적 변화와 복원 과정까지 일곱 장으로 나누어 명료하게 서술했다.

특히 세계유산 등재 과정과 유실 서적의 환수까지 다룬 마지막 장은, 소수서원이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도 살아 움직이는 공간임을 입증한다. 부록에는 연표와 입원록, 정관, 도동곡 악보 등 방대한 사료가 실려 있어 학문적 가치도 놓치지 않았다.

형식만이 아니다. 참여한 이들의 면면도 특별하다. 제자(題字)는 정범진 전 원장이 직접 썼고, 김관용 전 경북지사와 이배용 한국의서원통합관리센터 이사장, 안병우 소수서원 운영위원장 등 학계·문화계 주요 인사들이 축사와 발문을 더했다. 내용에 깊이를 더하고, 책에 품격을 부여한 이들의 참여는 곧 소수서원이 지닌 문화적 위상과 사회적 존중을 반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이다. 당초 편집을 마쳤지만 유림 내부에서 새 자료 반영을 요청했고, 집필진은 이를 수용해 보완 작업을 반복했다. 그로 인해 발간 시점은 미뤄졌지만, 결과적으로 더 깊이 있고, 더 충실한 책이 탄생했다. 누군가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과정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 지연이야말로 ‘전통을 지키는 태도’다. 빠르게 출간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확성과 충실함이었다. 「계묘본」은 그 점에서 완성도 높은 집념의 기록이다.

전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을 잃는다. 전통의 가치는 기록되지 않으면 잊히고, 공유되지 않으면 사라진다. 「소수서원지(계묘본)」은 이 시대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고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서원’이라는 전통 공간의 현대적 의미와 역할을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지금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통과 정신, 지역의 기억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바로 이럴 때, 「소수서원지」 같은 기록은 지역 문화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후대에게 전할 수 있는 유산이 된다. 단지 과거를 말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오늘을 되짚고, 내일을 고민하게 하는 거울이다.

「소수서원지(계묘본)」은 단지 서원의 역사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는 공동체가 기억을 어떻게 보존하고 계승해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의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발간은 지역 문화사에 남을 중대한 사건이며, 전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모범이다. 이 소중한 성과가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역 학교, 도서관, 연구기관뿐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읽고 공유하며, 소수서원이 품은 정신을 오늘의 삶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소수서원지」는 진정한 ‘살아있는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