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칼럼] 연백延白 이이야기 – 북파 공작선을 타고 월남한 막내 이모
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나의 외할머니는 딸 셋을 낳고 일찍 세상을 버리셨다. 해방되던 해, 외증조부께서 자신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와 큰아들의 둘째 딸을 짝져 분가시켰다. 막내 이모는 6.25가 나기 전해에 이웃 마을 양반 가문 부잣집에 시집갔다. 이모부는 서울서 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대를 이어야 한다고 집안에서 서둘러 치른 혼사였다. 38선이 그어졌지만 연백 사람들은 여전히 왕래하고 혼인도 했다.
어수선한 시절이었지만 아버지는 처조부이자 머슴으로 일하는 집주인이 떼어준 논을 정성껏 가꿨다. 개성 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렇게 6.25가 시작되었지만 연백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너 달이 지나, 아버지는 애써 지은 쌀 대부분을 인민군에게 빼앗겼고 큰아버지는 징발되어 후퇴하는 인민군의 짐수레를 끌다 미군의 폭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도망쳐 오셨다. 그해 겨울 1.4 후퇴 때,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는 가족을 데리고 해주에서 피난선을 타고 여수에 내려 순천에서 피난 살았다.
외가 식구들과는 소식이 끊겼다. 그해 겨울 막내 이모부는 집으로 돌아와 있다가 다시 식구들을 데리고 피난 길을 떠났는데, 이모는 피난길에 같이 가지 못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험한 길을 나설 수 없었고 무엇보다 나이 많은 시아버지가 혹독한 피난살이를 견딜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모부는 외딴곳에 은거를 마련해 이모와 아버지를 머물게 하고 나머지 식구들만 데리고 피난해 자리 잡았고 곧바로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 숨어 있으면 다시 오겠다며 헤어졌는데, 전선이 고착되고 휴전선으로 굳어졌다. 연백 사람들은 해방되자 38선으로 나뉘어 살다가 1.4 후퇴 때 피난 내려오고 못 내려온 사람들은 북쪽에 남겨졌다. 가족과 헤어져 두 해를 막내 이모는 아이와 늙은 시아버지를 돌보며 지내다가 휴전을 맞았다. 아기가 열병을 앓다 잘못되자 이모는 그곳에 더는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도 갈 수만 있으면 너만이라도 남쪽으로 가 아들을 만나라고 타일렀다.
휴전이 성사되고 연백과 강화도 교동 사이는 음험한 공간이 되었다. 밤이면 남과 북의 공작선들이 은밀히 오갔다. 연백 바다는 개펄이 발달한 곳이다. 여러 차례 간척사업으로 논이 되었지만 드넓은 개펄은 여전했다. 물이 빠지면 주변 사람들이 나와 조개를 주워다 먹었다. 모두가 피난 갔을 때 연백에 남았던 이모는 틈나는 대로 개펄에서 조개를 주워다 시아버지께 드렸다. 대합을 그늘에 널빤지로 덮어 눌러두면 닷새는 살아있었다. 이모는 시아버지가 대합 회를 유독 좋아해서 자주 조개를 주워서 개펄 주변 바다를 알고 있었다. 그날 이모는 시아버지께 하직하고 개펄에 나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조개를 줍기 바빴고 총을 멘 인민군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썰물이 점점 멀어지고 이모는 조개를 줍는 척하며 점점 물을 따라 멀리 나갔다. 개펄 끝에는 섬이 있었는데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밤이면 남쪽 공작선이 섬에 드나든다는 소문을 들었다. 무작정 남쪽에서 오는 공작선을 타야겠다는 요량으로 조개를 줍는 척하며 섬 바위 그늘에 숨었다. 바위를 기어올라 숲속에 몸을 숨기고 무작정 기다렸다.
그날 밤이 새도록 공작선은 오지 않았다. 춥고 배고프고 초조한 시간을 견디며 하룻밤 더 기다리고 안되면 되돌아가리라 작정했다. 그날 밤 자정이 되자 작은 목선 한 척이 다가왔다. 배 위에서 붉은 섬광이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랜턴 불빛이 깜빡였고 배가 기슭에 닿았다. 그때, 이모가 조용하게 말했다. “여기 사람 있어요” 순간 섬에 있던 사람과 배가 숨을 죽였다. 공작원들이 당황해서 숨소리도 안 내고 있을 때 이모가 한 번 더 조용하게 말했다. “남쪽으로 데려가 줘요” 조금 있으니 배에서 “몇 명이오?”하고 물었고, 혼자라고 하자 불빛을 깜빡였고 섬에 숨어 있던 공작원이 다가와 이모를 배에 태웠다.
공작선은 고동을 거쳐 강화도에 있는 어떤 장소로 이모를 데려갔다. 휴전이 이루어지고 월남한 사람은 철저하게 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용산에 있는 미군 방첩대가 주관했다. 이모는 저간의 사정을 모두 말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내려왔다며 “임 아무개가 내 남편인데 군대에 갔다고 들었다” “남편을 찾아 달라”며 매달렸다. 이름 석 자만으로 군인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난감해진 부대에서는 이모를 관사 하우스키퍼로 삼고 찾을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이모는 여섯 달이 지나고 이모부가 찾아와 재회할 수 있었다.
공작선을 타고 월남한 우리 막내 이모의 이야기는 외가 친척들은 다 외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섭고 춥고 힘들고 답답했던 그때 이야기를 누에처럼 풀어내셨다. 나와 연백을 질기게 이어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