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중의 영주 톺아보기 [187] 낙엽과 쓰레기는 다르다
김신중 시인
가을의 끝자락, 바람결에 흩날리는 낙엽이 발에 밟힌다. 낙엽은 나무가 자신을 위해 떨군 것이다.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잎을 스스로 놓아줌으로써,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한다. 낙엽은 죽음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생명을 준비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스스로 떨어져 땅속으로 돌아가며 다시 흙이 되고, 그 흙은 다음 봄의 새잎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낙엽은 완결된 하나의 순환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이 스스로 내리는 결단의 표식이자, 생태적 책임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반면 쓰레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필요에서 생겨나 버려진 잔재이기에 자연의 순환에 속하지 못한다. 스스로 썩지 못하고 오히려 남아서 자연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해친다. 어쩌면 쓰레기는 인간이 남겨놓은 최악의 유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곱게 보려고 해도 목적을 다한 물건이라 흉하다. 낙엽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은 것이라면, 쓰레기는 아주 오랜 시간, 아니 백 년이 넘어서도 자연에 속할 수 없는 불행한 산물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낙엽의 순환을 닮은 사람과 쓰레기처럼 순리를 해치는 사람이 있다. 낙엽 같은 사람은 낙엽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과 같이 떠나는 자리에서도 아름답다. 들 자리와 날 자리를 알아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 그들의 존재는 누군가에게 쉼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남을 만한 온기를 남긴다. 그들이 남긴 자취는 언젠가 새로운 사람을 자라게 하는 비옥한 흙이 된다. 떨어지기 직전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고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훌훌 벗어던진다.
그러나 쓰레기를 닮은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떠나야 할 곳도 마땅하지 않지만 억지로 남아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공동체를 어지럽힌다. 자신이 이미 제 역할을 다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간을 침범한다. 쓰레기가 스스로 분해되지 못하듯,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 변화와 성찰을 거부하며 타인에 대하여 귀를 막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막다른 골목까지 가게 된다.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도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그냥 생색을 낸다.
낙엽 같은 사람은 퇴색해 가면서도 나름의 의미를 남긴다. 낙엽이 지는 모습은 겸허함의 상징이다. 자신을 스스로 낮추며 비워내는 삶의 태도는 결국 또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나무는 잎을 버리지만, 그 버림을 통해 새로운 봄을 약속하게 된다. 사람 또한 물러날 때를 알고 물러날 때 비로소 존중받는다. 이형기 시인은 <낙화>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여 낙엽 같은 사람을 노래한다. 이런 이별을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이라고 했다.
가을바람이 부는 길을 걸으며 문득 낙엽을 밟아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속에서 한 생애의 끝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동시에 느낀다. 낙엽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조용히 돌아간다. 그것이 자연의 질서이자 존재의 품격이다. 가을은 그 차이를 일깨워 준다. 삶의 어느 순간, 우리도 누군가의 발길 아래에서 바스락거릴 수 있다. 그때 우리가 남길 것은 썩어 다시 흙이 되는 낙엽일까, 아니면 아무리 치워도 흉하게 남는 쓰레기일까.
가을은 인문학적인 깊이가 있는 계절이다. 아마도 가을이 소멸의 계절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누구처럼 썩어 다시 흙이 되는 낙엽이 될 것일까, 아니면 낙엽 속에 있어도 뚜렷하게 흉하게 남는 쓰레기가 될 것인가. 순환 속에서 사라질 줄 아는 존재, 누군가의 봄을 위해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사라져가는 존재의 의미를 붙잡기 위하여 집착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다잡아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