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칼럼] 선비의 교육이념은 교육공개념이었다
황재천 (금계종손)
선비들은 교육을 중시했다. 그들이 평생 해야 할 일 중에 교육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이 가진 뜻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간 관직에서 자신의 뜻을 펴기 힘들면 낙향하여 젊은 사람들을 가르친 선비도 많다.
정례적으로 치르는 관직 등용 시험인 식년시(式年試)로 3년에 한 번 치르는 시험이니 평생을 기준으로 해도 기회가 많지 않고 합격자도 문과의 경우엔 33명에 불과했고 무과의 경우엔 28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험에 통과해도 뜻이 맞지 않는다고 자리를 던진 다음 하던 일이 바로 미래 세대 양성이었다. 그만큼 선비에게 교육은 평생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선비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교화’란 말이 참 많이 나온다. 교화는 한자로 敎化이다. 가르쳐서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이다. 교화는 백성들을 대상으로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랑캐에게도 적용하는 말이었다. 당시 오랑캐는 바다 건너 오랑캐와 북쪽 오랑캐였다. 바다 건너 오랑캐는 왜인(倭人)이었다. 당시 왜인으로 우리나라 바닷가 지역을 노략질해 왜적(倭賊)으로도 불렸다.
침략하는 북방 이민족은 호인(胡人)이었다. 침략한 호인(胡人)은 만적(蠻狄), 번민(蕃民), 외이(外夷), 이적(夷狄) 등으로도 불렸다. 우리가 역사 기록으로 배운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표현에도 왜와 호라는 오랑캐 글자가 들어있다. 이들 오랑캐를 대상으로 국방을 정비하는 과정 또는 전쟁 중에도 교화라는 말이 나온다. 호전적인 오랑캐도 가르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선비들이 가졌다 하겠다.
선비들에게 교육은 교육 공개념으로 이해되었다. 교육은 공공의 차원이었다. 교육은 개인의 권력 또는 재력 취득의 수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사람이, 더더 많은 사람이 잘 살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교육은 ‘배워서 남주는 것’이었다. 공공의 차원이니 나라가 해주는 것이고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보는 사람은 선비가 아니었다. 나라가 해주지 못하면 자기 한 사람이라도 실천하고자 했던 공개념으로서의 교육이었다.
개인이 하기 힘드니 지역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교육 기관을 세우기도 했으니 우리 지역,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소수서원이다. 선비들이 가진 교육 이념이 ‘교육 공개념’이다 보니 소수서원은 국립이 아니라 사립임에도 기본적으로 무료였다. 학생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는데 기숙사비 또한 기본적으로 무료였다. 선비들에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무료란 점은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다.
선비들은 국가가 세운 교육기관, 지역이 세운 사립교육기관에서의 교육만 바라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학교를 만들었다. 정사와 같은 교육기관이 그에 해당한다. 정사는 한자로 精舍이다. 정신을 기르는 곳이라 이해할 수 있다. 精舍는 대체로 창건자가 직접 교육을 담당했다. 찾아오는 학생들이 무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묵어가면서 경제적 부담을 하지 않았으니 요즘 말로 하면 기숙사비도 기본적으로 무료였다. 어릴 때 어른들께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생각난다.
당시 풍기역 근처 서부동에 있던 금계종택이 전란 중 폭격을 받아 금양정사를 종택으로 쓸 때였다. 살던 금양정사 건물이 학교란 걸 듣고, 돈을 꽤 벌었겠단 질문을 했더니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분이 웃으면서 ‘집안 거덜나기도 하지’란 답을 했다. 그 말의 뜻이 무슨 말인지 당시 몰라 당황스럽고 ‘이상한 어른’ 쯤으로 생각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정사(精舍)가 학생들에게서 돈을 받지 않았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립교육기관이지만, 나라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과 지역이 지원하는 비사액서원을 넘어 개인 차원에서 교육을 위해 건물을 짓고 교육비를 받지 않는 활동을 한 게 선비들이었다. 그들을 이해하는 게 지금도 쉽지만은 않지만, 엄연히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선비의 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