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애향인 인터뷰[127] 지금도 연구개발에 몰두하는 ㈜디씨테크 김사동 대표의 나의 살던 고향은
사막의 설계자, 환경기술 개척자에서 애향인으로…“고향은 내 뿌리입니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무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편집자 주>
열사의 땅 사우디에서 10년, 설계 책임자로 현장 지켜
기업 경영하며 학사부터 박사까지… 기술개발로 100여 건 특허
환경기술로 대통령 표창… 전국 지자체 80% 적용 성과
향우회·모교동창회 이끌고 장학금 기부로 후배 양성 앞장
젊은 시절 열사의 사막 사우디에서 2~3년도 어렵다는 근무를 10년 가까이 하고 환경 관련 기업체를 창업해 경영자로 열정을 바치면서 업무와 학업을 연결해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고 재경 영주시 향우회와 초중고 모교 동창회 활성화를 위해 힘쓴 애향인이 있다.
바로 ㈜디씨테크 김사동 대표이다. 모교 장학 사업에도 많은 자금을 출연해 후배 양성에 앞장서 왔다. 6.25전쟁의 와중에 태어난 그는 다들 은퇴가 당연한 나이에 지금도 환경 관련 기술 개발을 하는 현역이기도 하다.
지난해 인터뷰 요청했던 황재천입니다. 이제야 인터뷰에 모시게 되었습니다(함께 웃음)
그렇게 되었나요? 내가 뭐 잘난 것도 없고 훌륭한 고향 분들이 많으신지라..
애향인의 그런 겸손 때문에 제가 힘듭니다. 어디에서 태어나 자라셨는지요?
이산면 석포리입니다. 7남매의 넷째였지요. 고향에서 학교는 이산초등학교, 영주중학교, 영주제일고등학교입니다. 영주제일고는 그때 영주종합고등학교로 막 바뀌는 시점이고 제가 입학할 땐 영주농고로 농과만 있었습니다.
이산면 석포리에서 이산초등학교를 다니려면 당시 외나무다리를 건너셨겠는데요?
버스도 없고 시멘트 다리도 없었습니다. 외나무다리가 당시 내성천에 여러 개가 있었지요. 외나무다리의 폭도 좁았어요. 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고속도로 급이랄까(함께 웃음), 홍수가 나면 외나무다리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물이 넘치니 봉화군 도촌리 지경까지 상류로 한참 돌아가야 했어요.
아침 일찍 서둘러도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어서 학교에 도착할 때도 있었어요. 겨울에는 외나무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기도 했어요. 그러면 옷이 꽁꽁 얼어 하루 종일 버석거리고....
아니.. 그런 상황에 학교에 출석하셨군요.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통학하셨나요?
글쎄, 왜 그랬는지... 학교에는 꼭 가야한다고...(함께 웃음). 사실 위험하기도 했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집에서 통학할 때도 있었고 자취생활을 할 때도 있었어요. 집에서 통학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어요. 그렇게 다닌 주변 친구와 선후배들이 있었으니까요. 요즘 기준으로 보면 3~4만 보 정도 걸었었던 것 같아요.
자전거를 이용하시진 않았고요?
자전거를 이용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는 키가 작고 체력도 약해서 언덕길을 자전거로 올라갈 수 없었어요.
고향 친구들 만나시면 그 이야기 하시겠군요. 고등학교 졸업 후 군입대 하셨는지요?
고향 친구와는 그런 옛날 이야기가 꼭 들어가지요(함께 웃음). 영주제일고 졸업 후 머리카락이 길기도 전인 빡빡머리 상태에서 공무원 시험을 보고 그해 7월부터 근무했어요. 당시 김신조 습격 사건으로 군인들의 제대가 6개월 늦어지면서 난 입대도 취소되어 공무원으로 근무도 더 했었지요.
군 제대 후 국제종합건설에 입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경기도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 이천시에서 또 공무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가 건설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회사 급여 수준이 높았기도 했고, 이천이란 곳에서 계속 근무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요. 그러고 보니 공무원 생활도 햇수로 7년 정도 했군요. 7년 속에 군 복무 기간이 포함되어 있어서(함께 웃음).
토목건축 관련 전공도 아닌데 건설회사 들어가셨군요. 군 생활을 공병대에서 했어요. 그때 토목건축 관련 설계도 하고 공사도 하고... 군 복무 시의 일이 계기가 되어 지금에 이어지는군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공무원 그만두고 측량토목용역회사에 근무하다 국제종합건설로 옮겨 바로 사우디에 파견 나가서 10년 정도 있었습니다. 80년대 초였지요. 낮은 섭씨 50도가 넘는 날씨고 보통 2~3년이면 교체가 되는데 공사 설계를 한 사람은 설계대로 공사가 되는지를 계속 확인해야 하고, 하나가 끝나면 다른 곳 설계와 공사를 또 해야 해서 10년을 거기에 있었습니다.
주로 어떤 공사였나요?
하수도 공사였어요. 당시 사우디가 지금 같은 나라가 아니었고 사회기반시설이 취약하던 때였어요. 용변을 보면 밖에 적당한 곳에 던져놓고 방치했던지라 도시화가 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었지요. 40개 정도 되는 마을을 연결해 하수처리시스템을 처음 도입해 설치했지요.
10년 가까이 열사의 사막에 계셨네요. 체력도 약하신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없는 형편이었는지라 돈을 벌어야 했고 거기다 내가 설계했으니 제대로 만들어지는지도 보아야 했고요, 설계한 사람이 준공 처리까지 봐주어야 일이 제대로 마무리될 수 있거든요. 회사도 그런 걸 바랬고요. 무얼 하면 고생을 해야 뭐가 생기지 고생 안 하고 편하게 만들 수 있는 게 있나요. 회사 다니면서 측량기사를 시작으로 자격증을 여러 개 땄군요. 일하는 데 필요하기도 했고요.
군 복무를 공병으로 하시고 그 일이 공사 설계 업무로 이어지고... 고등학교 때의 전공이 토목도 아니었는데 고생 좀 하셨겠습니다(함께 웃음).
3년의 공병대 생활에 애 좀 많이 먹었습니다. 혼자서 더 공부해야 했어요. 또 다른 나라 가서 공사를 하려면 영어를 써야 했어요. 영어를 모르면 그 나라 가서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요즘처럼 영어를 익히는 방법이 다양하지 않았던 시기였어요. 혼자서 어쨌든 반복하며 노력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취업하셨는데 나중에 환경공학으로 박사학위도 취득하셨습니다. 대학은 언제 다니셨어요? 환경 관련 회사 창업 후에 진학하셨나요?
네. 영주제일고 졸업 후 대학 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형편상 진학을 못했어요. 대학은 환경 관련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 다녔어요. 숭실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야간 수업, 주말 수업으로 공부를 했고 8년 정도 걸려 졸업했습니다. 석사와 박사 학위 과정은 환경공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단국대에서 했습니다. 전공을 바꾸니 석사 과정에서 선수 과목을 이수해야 했지요.
회사를 경영하시면서 대학, 대학원 공부를 하셨다니 대단하십니다.
대학‧대학원은 모두 업무와 연관이 있기도 했어요. ‘젠트로’라는 환경 관련 회사를 경영해야 했고 또 환경 관련 기술 개발도 여러 개 하고 있었거든요. 환경 관련 기술은 고향 하수처리장, 정수장, 배수지 등에도 적용되었습니다.
사실 전국 지자체 약 80%에 적용되었지요. 대학을 다닌 건... 기술 개발은 교수 등 전문가들과 협업을 하는 게 좋기도 했고요. 기술은 자꾸 새로운 게 나오거든요. 공부하며 기술 개발하고 기술 개발하며 공부하는 그런 과정에 나중에 박사학위까지 이어졌습니다.
환경 기술 개발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신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녹색경영대상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습니다. 그때 (주)젠트로 부사장이었습니다. 그 전에 환경기술상을 받기도 했었군요. 국가기술개발에 공헌했다고 해서..
상을 받으셨다는 건 공로가 크다는 것이거든요. 사업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기술 개발을 하시고 특허도 많이 취득하셨더라고요. 온라인을 검색하니 불소화합물이 포함된 폐수 처리 방법, 방수 구조체 및 방수 시트 고정장치, 정압연선 인장 실린더(Auto-Back 인장장치) 등등이 뜨네요.
네. 개인 이름으로 된 특허가 100여 개 있습니다. 국가기술개발 5개도 있습니다. 지금도 연구 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분이랑 같이 창업한 환경 기업 이름이 젠트로인가요?
네. 지금은 이미 매각을 했습니다. 매각 후 아쉽기도 했습니다만 매각 후 새로 회사를 다시 창업했습니다.
지금도 연구 개발을 하시고.. 바쁜 경영활동 중에 고향을 위한 활동도 많이 하셨더군요. 재경 영주시 향우회 부회장, 재경 영주중학교 동문회장 등 직책에다 후배들을 위한 장학 사업도 하셨고요.
난 별로 한 것이 없어요. 제가 했다면 그건.. 제가 여건이 되었으니 했지요.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겁니다.
대단한 일을 하셨는데 간단히 대답하시는군요(함께 웃음). 건강하셔야 합니다. 지역 소멸이 고향의 문제입니다. 젊은이들이 없고요.
요즘 건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터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를 구하기 힘든 게 나라 전체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놀고 있는 젊은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한편으로 생각을 다르게 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농사 하나만 보더라도 시골에서 힘들게 예전처럼 농사짓지 않고 스마트 농법으로 농사 현장 환경을 확 바꾸면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가 있고 기존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필요도 있겠지요. 회사 기술 개발도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아. 그렇겠습니다. 감사하고 멋진 말씀입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김사동 대표 프로필>
- 영주 이산면 석포리 출생
- 이산초, 영주중, 영주제일고등학교 졸업
(당시 영주농고에서 종고로 전환 시기)
- 숭실대학교 경영학 학사
단국대학교 환경공학 석사·박사
- (현) 디씨테크 창업 대표
- (전) ㈜젠트로 부사장, 감사
- (전) 국제종합건설 근무 (사우디 근무 10년 포함)
- (역임) 재경영주중학교총동문회장, 재경영주제일고명예회장
- (수상) 대한민국녹생경영대상 대통령 표창, 환경기술상 수상,
산업자원부 장관 표창 등
- (특허) 특허 100여개, 국가기술개발 5건
- (저서) 「Hybrid AOP 시스템을 이용한 염료 폐수처리」 외 여러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