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77] 비밀번호
*시영아영-시를 읽으면서 나를 되돌아본다는 뜻입니다
2025-07-31 영주시민신문
비밀번호
- 문현식
우리 집 비밀번호
□□□□□□□
누르는 소리로 알아요
□□□ □□□□는 엄마
□□ □□□ □□는 아빠
□□□□ □□□는 누나
할머니는
□ □ □ □
□ □ □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이제 기억으로만 남은 소리
보 고 싶 은
할 머 니.
- 느린 이야기
기침 소리,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속도만으로도 누구인지 아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을 열 때마다 번호를 누르고 난 후, 띠리링~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조급함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이 동시는 느린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문을 열려고 구부러진 허리춤에 손을 넣던 오래전 할머니. 구겨진 영수증도 나오고, 녹다 만 알사탕도 나오고, 주섬주섬 열쇠 꾸러미도 나오던 할머니의 느린 손길은 비밀번호로 이어진 손길에서도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보 고 싶 은/ 할 머 니”의 한결같은 사랑처럼요.
“제일 천천히 눌러도/ 제일 빨리 나를 부르던” 할머니의 온도가 묻어 있는 비밀번호.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움을 여닫는 시간마다, 아이가 아는 소리로 기억되는 번호를 느릿느릿 눌러봅니다. 삐- 삐- 삐~ 번호 누르는 소리가 뭉클해, 코끝을 훔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