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다… 시민 스스로 움직였다”
오픈채팅방만 2천600명… 현수막, 서명운동, 집회까지 ‘이름 없는 시민’ 말기암 이희진 목사 외침에 불붙은 연대… 납공장 반대, 역사적 시민운동 확산
“누가 조직했냐고요? 아무도요. 그냥, 우리가 시작했습니다”
대법원 패소 이후 꺼지는 듯했던 납 제련공장 반대운동이 영주 역사상 유례없는 시민행동으로 번지고 있다. 특정한 지도자도, 정당도, 조직도 없다. 주부, 직장인, 청년, 어르신까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뭉친 시민들이, 스스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3년 전, 일부 환경단체가 제기했던 우려가 이제 2천여 명이 광장에 모이는 시민 총궐기로 성장했다. 전례 없는 규모. 전례 없는 방식. 전례 없는 연대다.
▲ 오픈채팅방에 모인 2천600명… “광장의 시민들이 실시간으로 움직인다”
불씨는 뜻밖의 곳에서 피어올랐다. 납공장 추진 소식과 함께 오픈된 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열흘 만에 1천900명이 넘게 가입했고, 지금은 2천600명이 넘는 시민이 이곳에서 정보와 자료, 일정과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한마디로 ‘온라인 시민광장’이 만들어 진 것이다.
모두 자발적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피켓 문구를 만들고, 서명지를 돌리고, 현수막을 걸고, 카드뉴스를 만들어 올린다. 집회 일정도 여기서 정해지고, 반대 서명지는 출력돼 골목마다 배포된다.
시내 곳곳에 내걸린 수백 장의 반대 현수막은 이 채팅방에서 나온 문구로 개당 1만원에 제작됐다. 현수막 제작업체는 “반대운동 참여는 당연하다”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개당 1만 원에 제작을 자청했다”고 말했다.
서명운동에 나선 업체는 병원, 약국, 편의점, 카페, 식당 등 67곳. 입구에 직접 손글씨로 ‘납공장 반대 서명받습니다’라고 써 붙였다. 이들은 모두 이름 없이, 대신 각자의 삶터에서 의지를 걸고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
▲ “말기암 목사의 외침에 시민들이 다시 불타올랐다”
운동에 다시 불을 붙인 건 문수면 소재 빛마을교회 이희진 목사였다. 초기부터 반대운동에 참여해온 그는 현재 말기암 투병 중이다. 위중한 상태임에도 “영주에 납공장은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자 잠시 지쳤던 시민들이 다시 깨어났다. 한 유트브에 투병 중인 이 목사의 모습이 공개되자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영상에서 이 목사는 “저희 아이들이 살아갈 땅에 납공장이 들어온다는 것을 도저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며 “영주시가 직권 취소하고 환경부에 질의해서 문제되는 것을 짚어가고 시민들과 마음을 합쳐서 영주시가 해야할 최소한의 책임을 하면 이길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후 채팅방에서는 “목사님이 저렇게 나서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여론이 일었고 이 말은 곧바로 시민행동으로 옮겨졌다. 집회 인원이 급증했고, SNS에는 “함께하자”는 글이 이어졌다.
▲ 노동자와 엄마, 청년과 어르신… ‘시민의 연대’가 이어졌다
1차 가흥 안뜰공원 집회를 시작으로, 영주역 광장에서 2차, 3차 궐기대회가 열렸다. 매번 2천여 명이 모였다.
주최는 대책위지만, 운영은 시민들 몫이었다. 노벨리스, SK스페셜티, KT&G, 철도노조 등 현장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고, 마을 단체와 종교단체가 함께했다. 지금까지 반대 의사를 공식 밝힌 단체는 총 45개다.
정치인 없이도, 리더 없이도 움직인 대규모 집회의 연단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를 둔 부모, 동네 어르신, 소상공인, 교사, 노동자다. 이들은 거창한 말 대신 단순한 진심을 외치고 있다. “아이 숨 쉬는 공기만은 지키고 싶다”, “납공장은 생존의 문제다”
▲ 시민의 결정, 시민의 행동, 시민의 도시
이처럼 영주의 납공장 반대운동은 특정한 조직이나 대표 없이, 시민들이 주체가 돼 이끌고 있다. 정치권은 침묵했고 행정은 책임을 미뤘지만, 시민들은 스스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한 시민은 “누가 시켜서 나온 게 아니에요. 그냥 우리 동네 일이라서 나온 거예요”라며 “아이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이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행정소송에서 진 건 행정이고, 포기하지 않은 건 시민”이라며 “지금 이 싸움은 공장 하나를 막는 게 아니라, 영주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