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시민행동 "엄마들이 뿔났다"

1천500여 명, 납 공장 결사반대 “납보다 아이가 더 소중” 유모차 끌고 자전거 타고… 보기드문 세대 초월한 연대 “시민 무시한 행정” … 생명을 위한 시민 총궐기 행동 법보다 생명, 판결보다 미래… 납 공장 전면 불허 촉구

2025-06-20     이영선 기자

“맑은 공기를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다”

지난 18일 저녁 7시, 영주역 광장이 붉게 물들었다. 해 지는 하늘 아래 시민 1천500여 명(주최 측 추산 2천 명)이 모여 “납 공장, 결사 반대”를 외쳤다.

이날 집회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자전거를 끌고 나온 아이들, 유모차를 밀고 나온 부모, 돗자리를 챙겨 앉은 가족까지 세대를 넘나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을 가득 채웠고 생명을 지키자는 절박한 마음만이 광장을 메웠다.

▲ “정치는 남 일, 아이는 내 일”… 부모와 아이들 무대에

이날 집회는 KT&G노동조합, 노벨리스코리아노동조합, SK스페셜티노동조합이 주최하고 영주납폐기물제련공장반대대책위원회가 주관했다. 무대에 선 사람들은 정치인도, 운동가도 아닌 대부분 평범한 부모와 아이들이었다.

KT&G노동조합 유수종 위원장은 결의문을 통해 “영주시민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됐고, 대기질·수질·토양오염 물질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며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가 위험하다. 공장 설립을 단호히 거부하고 불허한다. 지역사회와 연대해 끝까지 투쟁하며 무책임한 행정에 강력히 요구하겠다. 건강과 미래를 위해 지역 노동조합이 함께 하겠다”고 밝혔다.

SK스페셜티 노동조합 김현민 위원장은 “우리도 유해물질을 다루지만 최소한의 책임은 지킨다”며 “납공장 추진자들은 시민 동의 없이 사업을 밀어붙였다. 책임 경영도, 정직한 절차도 없었다. 이 싸움,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또 “3년 전 처음 반대 운동을 시작할 당시엔 지역 내 27개 단체가 함께했다. 현재 10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진실의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약자인 시민들을 대신해 우리가 나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밝혔다.

영주납공장반대대책위 황선종 간사는  “왜 피난을 가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연단에 올라, 납공장 설립의 심각성을 설명했다. 황 간사는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AP-42 배출계수’를 인용해 “폐기물 1톤당 약 52㎏의 기체 납이 발생하는데, 영주 납공장은 연간 3천500톤의 폐기물을 다루는 시설임에도 겨우 연 16톤 수준의 오염방지시설만 설치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실적으로 납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 방지할 수 없는 설비로는 기체 납이 외부로 퍼져나갈 수밖에 없다”며 “이는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로, 결국 피난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학부모 이현정씨는 “저는 정치인도 환경운동가도 아니다. 영주에서 나고 자란 두 아이의 엄마”라며 “우리 아이가 납 먼지를 마시며 학교를 다닐 순 없다”고 울먹였다.

문수초 2학년 정라엘 군은 “납 공장이 생기면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없어요.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며 친구가 부탁한 글까지 낭독했다. 그 말에 광장은 조용해졌고, 침묵과 환호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중학생 2학년 이설희 양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납 공장은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문제”라고 외쳤다. 박수 소리가 터졌고, 시민들은 아이들의 말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귀를 기울였다.

▲ 대법 판결 후 첫 행동… “납 공장보다 생명”

이날 집회는 대법원이 납 공장 설립을 허용한 판결 이후 두번째 열린 대규모 시민 행동이다. 시민들은 “영주시가 대응을 제대로 안 해서 재판에서 패소했다”고 비판했다.

1심 재판에선 시민들이 납공장 배출 물질 기준치가 200배에 달한다는 자료를 직접 조사해 제출했지만, 영주시는 단 한 건의 준비서면 서류만 냈다. 시민들의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다.

더욱이 영주시와 납 공장 측이 5개월 동안 128차례 통화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며 유착 의혹도 불거졌다. 시민들은 “시민은 외면하고 기업만 챙겼다”며 불신을 드러냈다.

시민연대는 성명서를 통해 “납 공장 반경 5㎞ 안에 어린이집과 학교, 대규모 아파트 단지, 기업이 몰려 있다. 설립을 강행하면 기업은 떠나고 도시는 무너질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이 공장은 폐축전지, 전극선 등에서 납을 추출해 하루 32.4톤, 최대 40.8톤을 생산할 설비다. 부지는 1만2천㎡에 이른다.

시민연대는 “집단 취락과 인접한 지역엔 공장 입지를 제한할 수 있다는 ‘산업입지 통합지침’이 있다”며 설립 저지 의지를 밝혔다.

▲ 단순한 집회가 아닌 “삶의 권리를 지키는 행동”

“영주에 살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 아이의 미래” 이 문장은 지난달부터 SNS와 엄마들 커뮤니티에서 퍼졌다. 아이에게 맑은 공기를 주고 싶어 영주로 이사 온 부모들이 늘고 있다. 지금 그들이 싸우는 건 납이다.

시민 예술단 ‘바보농부들’이 “과연 누가 죄인입니까?”라는 주제의 뮤지컬을 공연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퍼포먼스를 마친 뒤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들고 일어난 우리다. 1만 명이 모일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남산초 6학년 윤태윤 학생 

참석자들은 하나된 마음으로 “납공장 결사반대”, “허가를 중단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아이들도 손팻말을 흔들며 부모와 함께 외쳤고, 이날은 단순한 집회가 아닌 “삶의 권리를 지키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하늘은 맑았다. 아이들은 아이답게 뛰어놀았고, 부모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사나 피난 가는 길은 없어야 한다”, “납보다 소중한 건 우리 아이”라고 외쳤다.

청년 석철진(29)씨는 “저도 한 아이의 아빠다. 납 공장이 들어오면 모두에게 피해가 간다. 영주를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남산초 6학년 윤태윤 학생은 “납은 발암물질이다. 독성이 강해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 우리 영주시민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영주시는 다음달 9일, 납 공장 가동 개시 신고에 대한 허가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