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애향인 인터뷰[114] 짧은 자유시 ‘조각시’ 장르를 연, 시인·시조시인 이 하(이만식) 경동대 부총장의 나의 살던 고향은
고향을 품은 시심(詩心), 한국 시문학의 새 장르 ‘조각시’를 열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매년 단체 이끌고 고향의 선비 흔적을 찾고 작품 속엔 고향의 정취
인성을 중시해 전국 최초로 사회봉사활동을 필수학점으로 제도화
가장 열악한 오지의 대학을 최우수대학으로 종합평가 받는 쾌거도
우리나라에서 문학의 역사는 매우 깊다. 지금은 문학이 문학인의 전문 분야로 인식하지만 옛 선비들은 모두 문학인이기도 했다. 선비를 존경하며 고향 사랑이 깊어 매년 단체를 이끌고 고향 명소를 찾는 시인이자 학자가 있다. 그는 시문학의 한 장르를 열었다. 바로 자유시 중에서 짧으면서도 강렬한 ‘조각시’를 창시한 시인 이하(李夏)이다. 그의 본명은 이만식이다. 그는 시인이자 시조시인이면서 현재 대학교수이다. 경동대학교 창설 주역이었으며 현재 경동대 부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내성천이 흐르고 부모님과 정겨운 이웃이 있고 어릴 적 친구, 모교, 부석사, 소수서원 등 영주가 있다. 그의 시는 저명한 문학평론가로부터 ‘사상과 서정의 미묘한 선상에 완성된 미학적 시 세계를 구축했다.’라고 그 존재감을 검증받은 시인이다. 때로는 예리한 비판적 시각이 담겼으나 본연은 순수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어둠의 그늘이나 불순한 대상’도 정화한다는 평을 받는다. 지금도 자시(子時 : 밤 11시~새벽 1시) 제사를 고수하는 본가(도산면 소재)에서 부친의 기제사를 마친 다음 날 그를 인터뷰했다.
고향 평은이 영주댐에 잠긴 실향민이라면서요?
영주댐이 들어서며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도시로 자녀 가까이 간 사람들도 있고 영주 시내나 평은면 내의 이주지 등으로 간 이웃들도 있습니다. 저희 부친은 당신이 태어난 곳 도산으로 이사하셨습니다.
저는 안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돌 무렵 평은으로 이사하고 내내 이곳에서 컸습니다. 평은초등학교를 나왔고 대영중, 영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원래 부모님은 안동에 사시다가 풍기로 이사하셨고 그 뒤 안정면에 머물다가 평은면 기푸실(깊은실)로 이사하셨습니다. 한자로는 심곡(深谷), 주소명은 금광1리입니다. 어릴 때 기억은 대부분 평은입니다. 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내성천 아이’ 연작시도 이곳의 가난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을 담은 시입니다.
학창 시절의 추억도 많지요?
그럼요. 어릴 때의 추억은 나이 들어도 아릿아릿합니다. 내성천에서 친구들과 놀던 시절도 그렇고.... 영광고 다닐 때는 학생회장(당시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했습니다. 제때부터는 학교 대표는 공부 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송인호 선생님께서 강권해서입니다. 학생회장으로 가장 유망하던 친했던 친구에게 미안했지요(함께 웃음). 그 시절 꽤나 활동적이었습니다. 제 키가 커서인지 강한구 선생님의 권유로 배구 선수로도 뛰었습니다.
나중에 88 올림픽 국가대표를 지낸 정의탁이 당시 동료였습니다. 교지 편집장도 하고 문학 동인지도 만들고 시화전도 열었습니다. 친구가 경북에서 가장 큰 문학동아리인 문우회를 만들어 함께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박영교 선생님과 권석창 선생님의 문학적 영향이 컸습니다. 고3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문예지 학원문학상에 소설로 입상하여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같이 활동하던 친구 중 문학인의 길을 계속 가는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전문 분야로 가서 성공을 거두었지요.
당시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나요?
저희집은 농사지을 땅도 없었나 봅니다. 아버지는 살길을 찾아 안동에서 풍기로 이사하셨고 풍기에서 이발 기술을 배우셔서 안정에 잠깐 계시다가 평은에서 이발소를 여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려웠던 시절이었지요. 놀러 가면 날계란에 참기름 넣고 저어 주던 친구네 집은 참 부러웠습니다. 대부분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인지라 어릴 땐 경제적 어려움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고향 밭을 보면 고생이 떠오릅니다. 소를 빌릴 돈이 없어 어깨 줄로 훅지(쟁기)를 당겨 300평 밭을 다 갈았으니 말이지요.
경제적으로 어려우셨는데 대학 진학을 하고 학업을 계속하셨군요?
대학 진학을 부모님께 기댈 형편은 아니었고 돈을 벌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습니다.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데모 주도로 장학이 끊겨, 학원에서 수강생 관리하며 학원 창고를 거처로 쓰기도 했습니다. 책 세일, 포장마차 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만 말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건국대 국문과로 진로를 정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대학을 갈 당시 대학별로 특성이 있었습니다. 서울대야 예외입니다만 창작은 동국대, 고전문학은 고려대, 국어학은 연세대, 건국대는 평론이었지요. 저는 영광고를 다닐 때 평론에 관심이 컸습니다. 자연히 건국대로 진로를 잡았습니다.
네, 지금처럼 대학의 서열화보다 전공 특성이 중요한 때였군요. 대학 생활은 어떠셨어요?
지금의 입시 상황은 확실히 문제입니다. 인구의 수도권 집중도 그런 상황에 한몫하고... 입시제도를 비롯해 다방면으로 들여다보며 개선해야 합니다. 대학은 당시 시국 문제가 학생들에게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저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학생운동 단체로 대학 동아리 연합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대학CCM(Circle Chairman Meeting)이라 명칭을 붙이고 회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야학을 만들어 배움의 기회를 지니지 못한 불우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천여 명 배출했지요. 그러다 보니 수업도 자주 빠졌습니다.
교수님들이 그래도 저를 이쁘게 봐주셨는데 아마도 제가 교수님들께 예의를 다해 대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저는 은사님이나 친구 아버님을 뵈면 아직도 큰절로 인사합니다만 당시에 큰절로 인사를 드리는 젊은이가 별로 없어서인지 저를 인상 깊게 보셨나 봅니다. 학내민주화 주동자로 중징계받았을 때 구제 활동도 해주셨지요. 수업 거부 때문에 저를 오해한 교수님 한 분 계셨는데 대학원 시험 때 이분이 평가 교수셨고 실제로 곤란한 문제도 생겼지만, 그분과는 나중에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선비의 고장 영주 출신답게 젊은 시절부터 인성을 중시하셨군요. 인성이 좋은 제자로 평가받으셨나 봅니다(함께 웃음).
저는 인성이 사람의 삶에 가장 중요하다 봅니다.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가 생기는데 결국 인성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 봅니다. 전국 대학 최초로 사회봉사활동을 필수 학점으로 제도화한 일도 이를 중요하게 여겨서입니다.
교육과정 편성에는 기회교육으로 ‘3례 3습’(인사, 감사, 봉사하는 습관) 인성 함양 프로그램을 반드시 넣었습니다. 초중고생을 초청하여 대학 캠프를 실시했을 때마다 참여한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감사를 표하곤 하셨습니다. 참여 학생들도 자신의 품행이 바뀌었고 가정이나 학교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여깁니다.
저는 대학 보직 교수를 맡고 매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입소와 영주 소수서원에 학생들을 인솔해서 갔습니다. 제 나름의 고향 사랑이기도 하지만, 갔다 오면 다들 자신들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고들 말할 정도로 훌륭한 교육 탐방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감사를 표시할 때면 고향의 자랑스러운 유산 덕분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 자긍이자 보람이기도 합니다.
교수 활동은 현 대학에서 시작하셨나요?
처음 교단생활은 고등학교 교사로 시작했고, 포천의 경성전문대(현 경복대) 교수로 3년 있었습니다. 그러다 설립자님을 도와 경동대 개교에 참여하며 경동대로 옮겼습니다. 교육 환경이 열악한 최북단 강원도 고성에 설립하였으니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안한 취업사관학교로의 성과와 구성원들의 합심으로 이룬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 선정 등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그 뒤 동우대학과 통합을 주관하였습니다.
통합 당시 폐과되어 전공을 잃은 교수들에게 전환을 위해 대학원 진학과 유학비를 법인에서 지원하였기에 좋은 사례를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뒤 원주에 메디컬 캠퍼스와 경기도 양주 메트로폴 캠퍼스로의 이전과 특성화에 총책임을 맡았습니다. 교무처장, 기획처장, 온사람교양대학장 보직을 거치며 현재 경동대 부총장으로 있습니다.
사립대학의 고질인 법인 비리 등에 한때 낙망한 적도 있었지만, 맡은 학무만은 소신껏 바르게 주관해 온 보람으로 이제 퇴임을 일 년 앞두고 있습니다. 지역 소멸론의 시대인지라 요즘 지역에도 관심이 크고 함께 고민합니다. 현재 지역의 문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차원에서 설악투데이에 ‘이만식 교수의 조각시 산책’을 매주 정기연재하고 있고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장르로 자리매김한 조각시는 무엇인가요?
조각시는 여덟 말마디 내외의 짧은 자유시입니다. 일본의 하이쿠와 흔히 비교하는데 내용과 형태가 다른 우리 고유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시인이 자유시 형식으로 짧은 시를 지었습니다만 적절한 명칭과 범위가 없었습니다.
우리 전통문화 유산인 조각보에 착안하여 ‘조각시’로 명명하고, 이를 정립하여 2015년 첫 조각시 시집 <하늘도 그늘이 필요해>를 발간하였습니다. 조각시는 매우 압축된 표현이므로 고도의 함축성과 세계를 새롭게 보는 내포적 임팩트가 있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시의 참맛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 전통의 차문화 전수에도 관심이 많으시다면서요?
예, 우리 차문화, 매우 중요한 유산입니다. 옛 고구려 땅인 강원도 고성에는 최북단 차밭이 있습니다. 농약류와 비료를 일절 주지 않는 청정 ‘화진포산학다원’입니다. 신선한 차품이 최고입니다. 달홀다례회가 있는데 제가 최초로 재연한 고구려접빈다례를 지도하면서 차문화 보급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 속초문예대에서 문화 강연으로도 자주 소통하고 있습니다.
<시인·시조시인 이하(이만식) 프로필>
- 영주 안정 출생, 평은에서 성장, 평은초교(52회), 대영중(5회), 영광고(23회) 졸업
- 건국대학교 학사, 고려대 대학원 교육학석사, 건국대 대학원 문학박사
- 월간문학(시조)과 오늘의문학(시) 등단, 조각시 창시
- 평창동계올림픽 후원 위원, KBS 및 G1방송시청자위원, 남북민속축제 위원 등과 여러 신문 칼럼 활동
- 월간 <모던포엠> 초대작가 선정
- 세종문화예술대상(문학) 수상
- 현 경동대학교 부총장
- 문체부 우수도서 <지식인의 글쓰기>, 시집 <하늘도 그늘이 필요해> 외 저서 1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