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46] 구두
2024-12-20 영주시민신문
구두
-이태순
등불을 찾아다닌 허기 진 빈 배였다
벗어놓은 동굴이 축축하고 검고 깊다
조인 끈 풀어주던 봄
봄날의 강이 있다
어디서 밟았을까 꽃잎이 말라붙은
껍질은 껍질끼리 허물을 덮어가며
슬픔을 껴안아 준다
빈 배 한 척, 빈 배 두 척
-어떤 휴식
구두 신을 일이 많아지는 연말입니다.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자리마다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어야 할 나를 위해 잘 닦인 구두를 신습니다. 설렘을 신고 나가는 시간이 다 좋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가끔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실망을 묻힌 구두를 벗어 던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구두는 자존심이 되었다가, 허물이 되었다가를 반복합니다.
때때로 나보다 먼저 울고 있는 구두를 만나기도 합니다. 임무를 다 한 뒤 내팽개쳐진 고단과 어둠의 자락이 접히는 안쪽에서 끙끙거리는 구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꽉 조였던 끈 풀어줄 “봄날의 강”을 기다리는 뒤척임이 축축합니다. 벗겨졌을 때 더 깊게 배어드는 내 발과 빈틈없이 닮은, 내 천성이 무르게 누워 있는 것을 아프게 바라봅니다. 밥줄이었던 구두는 이제, “등불을 찾아다닌 허기 진 빈 배”로 글썽입니다.
약속이 느슨해집니다. 시간이 헐렁해집니다. 꽉 조인 긴장으로 헤매면서 굽 닳고 밑창 끊어진 구두, 그 끈을 풀어봅니다. 어느새 겨울에 닿은 “빈 배 두 척”에 쉼표를 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