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45] 나의 어린 왕자에게
김경미(시인)
나의 어린 왕자에게
-서유경
나 고양이 한 마리만 그려줘
그럼 넌 심드렁하게
공원이나 뒷골목에서 종종 마주치는
갈색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를 그려 주겠지
난 고개를 갸웃하며
이건 내가 원하는 고양이가 아니라고 말할 거야
넌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누가 봐도 딱 고양이인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아까보다 더 천천히 그려 주겠지
난 처음 고양이보단 좋지만
내가 원하는 고양이는 아니라고 말할 거야
이렇게 두 번 더 반복하면
넌 숨구멍 세 개가 뚫린 상자 하나를 그려 주겠지?
이 안에 네가 원하는 고양이가 있다고
난 그럼 웃으며 이렇게 말할 거야
고마워 사실 난 이런 상자가 필요했어
-아린 왕자, 어른 왕자
기운 염치가 보낸 것들, 혹은 가문 염치를 떠난 것들이 참 많지요. 그중 하나가 막무가내로 변한 어른을 떠난 어린 왕자입니다. 붙잡아 두려고 별수를 다 써 봤는데, 양 한 마리 데리고 다시 올 것만 같던 어린 왕자는 밤하늘 별 속에 영영 박혀 버렸나 봅니다.
피하지 못할 상실과 아픔을 마주할 때면, 숨구멍 세 개는 기본으로 뚫은 상자 하나 툭 떨궈 줄 어린 왕자를 염치없이 기다립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원하는 고양이”도, 우리가 어릴 때 데리고 다녔던 순한 양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해서요. 왕자를 만나 “고마워 사실 난 이런 상자가 필요했어”라고 웃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러나 어린 왕자를 품던 시간은 바래져 가슴만 아려옵니다. 그 아림의 순간이 진정한 어린 왕자와 마주하는 순간인지, 이제는 어른 왕자가 돼 버렸을까 두려운 비애의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목 말라보지 않은 사람, 길 잃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사막의 중요함을 모른다고 했던가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숨어 있을 우물 때문이듯, 사람이 아름다운 건 사막 속 우물을 함께 찾을 누군가(이제는 “고양이 한 마리만 그려”달라고 떼쓰는 아이들)가 있기 때문이라 믿어봅니다. 축제처럼 달콤한 물맛을 함께 느낄 누군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