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34] 바둑 두는 남자
김경미(시인)
바둑 두는 남자
-김샴
쉰다섯의 전장까지 판판이 패자였다
실패한 한 중년의 마지막 한 판 승부
밀리면 더 갈 곳 없는 종점에 서 있었다.
이겨도 얻어내는 전리품은 없었지만
함몰된 눈알 가득 불꽃들이 살아 튄다
세상에 남길 유훈이 살아있는 눈빛이듯.
마지막 외통수가 비수로 남았을 때
찌르지 못한다면 찔려야 했었기에
피르르 손이 떨리던 일대기가 끝났다.
여름옷 입은 채로 한 겨울에 발굴됐다
바둑 두는 남자의 노숙터 부장품은
살아서 빛나던 한때 아버지란 칼자루.
-한 점 돌파의 힘
대국이 시작되면, 돌을 던질 수(기권의 다른 표현)는 있어도 초침을 재는 동안은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는 게 바둑대회의 빡빡한 규칙이기도 하지요. 아버지가 되는 순간,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처럼요.
“쉰다섯의 전장까지 판판이 패자였”다고 누가 감히, 아버지란 호칭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 올라탄 어깨를 견디기 위해 준비해둔 칼 한 자루를 죽어서야 드러낸… 그때만 빛났던 “아버지란 칼자루”가 종종 슬픈 기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맞아요. 아버지인들 한 점 돌파의 힘이 없었을까요? 다만 아버지는 아무런 각주 없이, 가만히 빠지는 묘수를 택했을지도 몰라요. 푹 찌르면 푹 찔리고 다시 튀어 오르면 될 텐데 “찌르지 못한다면 찔려야”하는 방식에 순응했겠지요.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잊은 길목에서, 따라오는 생각이 많은 시조 한 편이 절절합니다. 종장마다 찍힌 마침표가 바둑돌로 보이는 건 저만의 착시일까요? 혼자의 일처럼 다녀가신 아버지가 마침내 던져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