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27] 호두에게

김경미(시인)

2024-07-25     영주시민신문

                호두에게

                                            -안희연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나다운 뒤척임

“문도 창도 없는” 껍질 속에서 호두는 얼마나 많은 고독이 있었을까요? “문도 창도 없는” 나의 방안에서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을까요? 호두의 속살이 그렇듯이, 쪼그라드는 나의 민낯이 만납니다. 편지 같기도 한, 고백 같기도 한 나직한 구어체로요. 한때는 관심도 없었던 호두의 말을 들으며, 호두를 이해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보냅니다. 그렇게 나를 더 알게 합니다. 보태어 너와 나를 넘어 우주와의 연결로 이어집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한없이 무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남들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본인은 늘 단단해지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왜 이 모양인가?’ 하고요. 그런 순간에 이 시가 온다면요.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임을 말하듯, 땀 닦던 손수건에 호두 몇 알 싸 들고요.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을 것 같고요.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면서, 상실할 것 없는 시간이 당분간은 이어지겠지요. 내공 꽉 찬 호두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