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24] 밤늪
김경미(시인)
밤늪
-문인수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다.
달빛 풀리는 물이랑이, 바람 타는 갈대숲이 추는
춤, 춤 속으로 흘러들 뿐 하염없이 오래
가만히 있다. 딴짓하지 않는다.
으스름 아래 어디 저 집요한 소쩍새 있다.
개구리 물오리 풀벌레 소리 또한 오래
딴소리하지 않는다. 저 몇 그루 뚝버들의 시꺼먼,
산의 시꺼먼 대가리들 또한 왈칵,
재채기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 오래,
무슨 일이 참 많다. 이 소란한, 방대한 고요가 그것인데
누가 밤새도록 걸어놓은 양수기의 발동 소리가,
거기에 발이 툭, 걸린 내 마음까지도 다시 긴
둑길을 따라 천천히 흘러 들어간다. 딴짓,
딴소리하지 않는다. 오래 가만히 있다.
-숨 고르기
“오래 가만히 있다”는 것은, 주어진 환경과 시간에 스며드는 것을 말합니다. “오래 가만히 있”는 사람은, 주어진 환경과 시간에 스며들 줄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시는 많은 소리가 밤을 깨워도 “오래 가만히 있”습니다. “딴짓”, “딴소리하지 않”고요. “달빛이 늪의 물에 오래 가만히 있”는 것처럼요.
언뜻 소란하기만 할 것 같은 사물들의 뭉침이 오히려 고요의 질서를 낳고 있습니다. 펼쳐진 현상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면서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하고 있습니다. 단정하지도 뻣뻣하지도 못한 화자조차 자연의 섭리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겸손한 멍에 들었습니다. 독자들까지 선의 경지에 들게 할 지경으로요.
“밤새도록 걸어놓은 양수기의 발동 소리”에 “발이 툭, 걸린 내 마음”만 “재채기하”듯 숨 고르기를 합니다. “오래 가만히 있는” 고요한 정점에 맞닿은 성찰의 시간이 됩니다. 태평한 여름밤만 깊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