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105] 오컴의 면도날

김경미 시인

2024-02-22     영주시민신문

                   오컴의 면도날

                                           -김 승

 

아침마다 덥수룩하게 자란 생각을 잘라냅니다

 

밤새 웃자란 생각은 쉽게 잘리지만

고정된 관념은 쉽게 잘리지 않네요

 

그제는 먼지처럼 구석에 쌓여있던 책을 버렸습니다

눈이 맞아 신혼집에 데려와 각주까지 사랑하던

 

어제는 옷과 신발 서류 가방을 버렸고

오늘은 일기장과 필기구를 버리겠습니다

마침표를 찍기 위한 한 자루 붉은 펜만 남기고

 

여분의 옷도 가져가지 말라시던 그분의 말씀 따라

생각도 웃자라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르고

표정도 말도 면도하겠습니다

 

옹이처럼 굳은 신념을 제거하기 위해

조용히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겠습니다

내일은

 

-나직한 저녁의 말

이 시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생의 종언을 앞둔 화자의 회한을 읊은 것일까요? 그러나 읽는 사람 각자의 사정에 다 맞아 들어가는 일들이 하나씩은 있지 않을까요? 얽힌 사물과 생각들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가 해석되기 전까지는, “마침표를 찍기 위한 한 자루 붉은 펜”만 남기기 전까지는 늘 어제였을 테니까요.

신념은, 평생을 통해 굳어버린 고정관념이라 달리 말할 수 있습니다. 나만의 철학, 나만의 시선으로 규정되던 것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힘을 잃어버리고 종국에는 나를 짓누르는 족쇄가 되어 눈을 흐리게 합니다. 그런 눈으로 잠 안 오는 밤을 지샌 아침이면 덥수룩한 생각만 잔뜩 자라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생각들이 고집을 만들고 억압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이 맞”은 단순함이 구구절절보다 진실에 가깝다는 ‘오컴의 면도날’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혹자는 내 마음의 소리(생각)만 들으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군말들이 또 얽매일 생각의 씨앗이 되어 바오밥나무처럼 뻗어 나갈지도 모를 테니까요. 낮에는 고요를, 밤에는 달만 하염없이 읽어도 충만한 마음이 될 수 있다고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