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 아영[95] 만년필

김경미 시인

2023-12-08     영주시민신문

                    만년필

                                                   -이종욱

 

그래, 잉크를 깨끗한 잉크를 넣어주마

그래, 너의 푸른 피를 닮은 시를 쓰마

그래, 하늘의 뜻을 푸르게 푸르게 펼치마

그래, 너와 함께 긴 밤도 짧게 불 밝히며 새우마

그래, 가냘픈 힘줄이나마 곳곳의 진창에 흙을 퍼 나르마

그래, 서러운 비가 와서 해가 없는 날 너를 찾으마

그래, 젖은 가슴 모두 양지바른 처마 밑에 데려가마

 

-내일도 푸르게 박히게 될

뭐든지 빠르고 기계화된 시대에, 오래된 감성 같은 시 ‘만년필’ 한 자루를 소환해 봅니다. 시인은 양처럼 순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뭇 시인들의 어떤 시보다 견고하고 강직하게 느껴집니다. “푸른 피를 닮은”, “하늘의 뜻을 푸르게 푸르게 펼치”는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강철보다 단단합니다. 안온함 속에 웅크린 신념이 쿵쿵 마음을 때립니다.

할 말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끄러운 글은 쓰지 않겠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정직함과 초심이 보입니다. 부드러운 글씨체로 써 내려가는 차갑고 고독한 목소리로 아직 피어나지 못한 뼈와 꽃 같은 아픔과 경고도, 박아 놓았습니다.

글다운 글을 잃고, 좋은 글을 고민하면서 깨끗한 잉크로 만년필 속부터 채워 봅니다. “서러운 비가 와”도 “젖은 가슴 모두 양지바른 처마 밑에 데려”갈 글, 독자들의 공감과 응원이 있는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펜촉에 조용히 입술을 대보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