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아영[88] CCTV를 돌리다가
김경미 시인
2023-10-19 영주시민신문
CCTV를 돌리다가
-서금복
상추밭이 뭉개졌다
콩잎도 다 따갔다
“도대체 누가 그랬는지 꼭 잡을 거야”
밭에서 돌아온 아빠
CCTV를 흙 묻은 손으로 돌린다
거꾸로 돌아가는 CCTV
아빠한테 혼나지 않으려고
고라니가 발로
상추를 일으켜 세운다
콩잎을 게워내
한 장 한 장 붙여 놓고
뒷걸음질로 달아난다
숨 몰아쉬던 아빠
흙 묻은 손 씻으러 간다
화난 얼굴도 씻으러 간다
-우리 아빠만 그럴까?
농부의 가장 큰 기쁨은 수확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주인의 발소리만큼 자라준다는 농작물. 아빠는 얼마나 많은 애정과 보살핌을 담아, 상추와 콩잎을 만났을까요? 그렇게 일궜는데… 뭉개진 상추밭과 콩잎을 보며 아빠는 화가 많이 난 것 같습니다. 씩씩 “숨 몰아쉬”며 범인 물색에 집중하던 아빠는 사람이 아닌 고라니의 짓임을 알고는 “흙 묻은 손”과 “화난 얼굴”을 씻습니다. 그러면서 평안해집니다.
이 동시 속 아이는 거꾸로 돌아가는 CCTV 속 영상도 봤을 것이며, 아무렇지 않게 씻으러 가는 아빠 얼굴도 봤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라도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을까요? 이런 실정이라면 우리 아빠만 그렇지 않고, 세상의 모든 어른은 아빠와 같은 마음일 거라 믿습니다.
아이의 열린 눈길과 속 깊은 마음은 아빠를 닮았겠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