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 아영[61]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김경미 시인

2023-03-31     영주시민신문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고영민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

한해 농사는, 그저 “푸석푸석 들”떴던 땅을 갈아엎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겉흙과 속흙의 자리를 바꾸면서 겉흙에겐 양질의 영양을 채울 시간을, 속흙에겐 그 영양을 나눌 시간을 줍니다. 그렇게 순리대로 일을 해나가면서 남은 몫은 자연에 맡깁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속흙이 되어서도 잊지 못할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사랑인지 슬픔인지 명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생각하면서 또 혹독한 겨울을 납니다. 기억을 잊으려고 기억을 떠올리는 역설의 방식으로 ‘내가 갈아엎은 후의 봄 흙’을 소망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사는 일은 겉흙과 속흙이 뒤바뀌고 사랑과 슬픔이 맞물리는 일이라고요. 겉흙과 속흙이 시간을 먹고 바뀌듯, 누군가를 잊고 누군가를 새로 익히는 동안 사랑도 슬픔도 변하는 것이라고요.

시의 맛이 참으로 엄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