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 아영[34] 땡초전
김경미(시인)
땡초전
-이태관
머리가 가려워진다는 건
흰 머리가 늘어간다는 것
햇살이 제 몫을 다하고
익어가는 나락들이 아이들 머리통처럼 단단해지는
그런 시절을 지나
붉은 고추가
아스팔트 위에서 제 몸을 달구는 시절에도
잠자리는 하늘을 날았지
어디였을까
남녘 끝머리 쯤,
매운 걸 싫어하는 내게 그녀는
땡초전을 시켜 주었지
부침개 위에는 고추만 보였다
후후, 불며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그런 적이 있었지
봄날, 심어놓은 고추가 땡초가 되는 사이
마음에 실금 하나 그어지는
그런 사이
-적색경보
“봄날, 심어놓은 고추가 땡초가 되는 사이” 많은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에 실금 하나 그어지는” 일부터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심심찮게 일어나지요. 상상 이상의 일들이 펼쳐지는 동안 “햇살이 제 몫을 다하고” 고추는 소중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겠지요.
“매운 걸 싫어하는 내게” 그녀(이변)가 시켜준, 땡초전 한 장은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자꾸만 허둥대고 졸아들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틈으로 날려 버린 무력함, 혹은 안간힘을 동시에 갖게 하면서요. 나와 그녀(태풍 11호 힌남노) 사이 한 뼘 거리조차, 거저 되는 것이 없고 마음대로 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정직한 휘어짐과 곧음이 있을 뿐입니다.
백만 마리쯤 되는 삵의 난장 같았던 태풍도, 구만리 장천에 보름달 띄웠던 추석도 지났습니다. 이제는 “붉은 고추가/ 아스팔트 위에서 제 몸을 달구”어 땡초가 되는 것처럼, 한 번 더 손을 내밀어 힘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