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 아영[26] 백일홍
김경미 시인
백일홍
-문성해
어젯밤
어디서 잤는지
머리에
붉은 실밥이 가득하다
수박장사 리어카조차
그늘에서 쉬고 있는
한낮
지린내가 진동하는
공터에
태양을 독점한 듯
미친 여자 하나
눈부시게
서 있다
-그리움, 그 붉음을 뽑다
백일홍에 관한 설화는 유명합니다. 한 바닷가 마을에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제물로 바쳐질 처녀를 짝사랑하던 청년이 대신 바다로 나가 이무기를 죽이고 오겠다고 하였지요. 성공하면 뱃머리에 흰 깃발을 달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겠다고 하면서요. 아, 좋은 일에 마(魔)는 꼭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끼는 걸까요? 성공을 알리는 위풍당당한 흰 깃발을 꽂았는데, 이무기의 피가 묻어 붉은 깃발이 되었다는… 슬픈 뒷이야기는 상상이 되겠지요?
꼬박 100일 동안 기도하던 처녀의 넋이 붉은 꽃으로 피었기 때문일까요? 찌는 여름에도 백일홍만큼 늘어진 시선을 붙잡는 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밤을 새운 기도로 미쳐 버린 “여자 하나”. 얼마나 간절했으면 처녀의 지고한 정절을 “머리에/ 붉은 실밥이 가득”한 “미친 여자”로 표현하였을까요?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덕분이겠죠.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시적 역설의 의미를 조금은 알고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가끔은 이렇게 변형된 감상문도 나옵니다. 상징과 의인의 기능까지 쉽게 캐내는 건 기본이고요.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가 멀어진 대신 자연적 거리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설핏설핏 불안한 눈빛을 자연으로 돌리니, 평소에는 보지 못 했던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백일홍도 그렇고요. 그리움의 속살은 이미 전설이 되었을까요? 겸허한 가을이 될 때까지, 여전한 슬픔에 고개 숙이지 않는 백일홍은 한여름 내내 “태양을 독점한 듯/ 눈부시게 서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