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 아영[20] 어느 날 낮 열두 시
김경미 (시인)
2022-05-27 영주시민신문
어느 날 낮 열두 시
-권준영
할 일 없으면 친구도 좀 만나고 산에라도 다니시지
이 좋은 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삼시 세 끼라니
시앗 보듯 전화기만 만지지 말고 청소기나 돌리시든지
청소기가 어디 있는데
베란다 구석에 있는 거 안 보여요
잘 안 돌아가는데
왜 안 돌아갈까 코드 꽂았나요
어디다 꽂아야 하는데
나도 몰라 콧구멍에다 꽂아보든지
-웃긴데 왜 짠하지?
아내에게 가장 큰 산이었던 남편이 애물단지가 되었습니다. 퇴직이 주범일까요? 건강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죽을 듯이 일만 했는데 얼굴은 녹아내리고 가슴은 새가슴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청소기 하나도 돌릴 줄 모릅니다.
언제부턴가 슬렁슬렁 바뀌던 판이 이제는 절정에 달했는지 아내의 위상은 하늘을 찌르고요. 그러니 남편은 어정쩡한 삼식이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나 봅니다.
이 시 속에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그 무서운 것, 정이 숨어 있습니다. 믿음 있고 탄탄한 부부가 아니라면 이런 말들이 오고 가지도 못 하겠지요. “콧구멍에다 꽂아보든지”라는 비아냥을 뱉는 순간 싸움이 날 게 뻔하니까요.
위트나 유머를 달고 있어도 아내의 시선, 남편의 시선 혹은 자녀의 시선에서 느끼는 감정은 다 다르겠지요. 그러나 웃픈(웃기면서 슬프다) 마음이 드는 건 모두 한마음일 것 같습니다.
같은 공기를 마셨고, 같은 눈물을 닦았던 부부이기에 남은 건 서로를 보듬으며 자유롭게 마음을 돌보는 일뿐입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이제는 정말 “친구도 좀 만나고 산에라도 다”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