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의 시영 아영 [10] 현관문을 여는 두 개의 방식

김경미 시인

2022-03-18     영주시민신문

현관문을 여는 두 개의 방식

-강영은

쇠 자물쇠와 도어 록,
여는 순서가 틀리면 잠겨버리는 두 개의 자물쇠가 있다

미로와 활로 사이 간절히 기다려 온 손이 있음에도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해 있는 열쇠는
자물쇠를 쉽게 내주지 않는다

어떤 날은 숫자가 자물쇠를 내어주지 않는다
감성과 감각이 엇갈린 숫자는
기억나지 않는 첫사랑처럼 거리를 헤맨다

열쇠가 되기 위해 살아온 고집 때문일까
부르짖고 갈마된 마음이 노크할수록
열쇠가 되고 싶어진다

누군가 몸을 만지면 겁이 덜컥, 난다는
집의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문 안쪽이 궁금해질수록 열쇠를 어머니로
바꾸고 싶어진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얼마나 쉽게
현관문을 여는가,

잊히지 않는, 잊고 싶지 않은 열쇠, 아무렇지 않게
쇠가 되고 숫자가 되기도 하는

 

-사소한 마법처럼

잘 열리던 현관문이 거대한 벽처럼 자신을 막아섰던 기억이 몇 번쯤은 있었을 테지요. 종일 일에 치여 가득 찬 오줌보를 안고 돌아와 급히 화장실부터 가야 할 때, 양손에 무거운 짐을 부린 채 어설프게 열쇠를 돌리거나 비번을 누를 때, 혹은 함께 온 손님이 뒤에 선 채 문을 여는 손길을 무심하게 쳐다볼 때지요. 꾹꾹 타는 속 때문에 문은 더욱 꿈쩍하지 않습니다. 사소하다면 참 사소할 행위가 혼을 싹 빼놓습니다.

그게 기계와 감성의 뚜렷한 차이입니다. “미로와 활로 사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혼재해 있는 열쇠는 자물쇠를 쉽게 내주지 않”습니다. 급하다 애원해도 절벽입니다. 알리바바처럼 ‘열려라 참깨, 열려라 참깨!’를 몇 번씩 외쳐대도 응답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정과 감성으로 되던 것이 이제는 먹히지 않습니다.

결국, 기억 속 어머니를 소환합니다. 그제야 피가 돕니다. 조바심치며 함부로 쑤셔 대던, 성급함을 밀며 함부로 눌러대던 잠금장치를 어머니는 물렁물렁하게 안심시킵니다. 숨처럼, 혹은 마법처럼 만 가지 고달픔이 흩어지게 합니다. 문이 탁, 열립니다. “잊히지 않는, 잊고 싶지 않은 열쇠”를 꼬옥 껴안으며 집안으로 들어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