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김판국 선생

만화가 김판국(60) 선생을 떠올리면 그가 20년 넘게 그렸던 경향신문의 시사만화 ‘청개구리’가 생각난다. 군사독재시절 반정부적 성격이 강했던 경향신문의 만화는 오랫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후일 고등학교 후배인 김상택 화백이 만평가로 합류하여 당시 “경향신문의 만화는 영주사람이 전부 그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경향신문의 청개구리 만화를 그려

벌써 30년은 지난 것 같은 옛날이야기가 하나 있다. 영광고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생의 두발을 배코에서 스포츠로 바꾸게 된다. 이 소식을 김판국은 만화로 그리게 되고, 크게 반향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고교생 두발 스포츠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4컷의 만화가 전국을 뒤흔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장문의 편지나 글 보다 짧은 만화가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화가 김판국 선생은 의성군 비안면 출신으로 대구의 칠성시장 인근에서 중석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강원도 영월에 살다가 초등학교 시절 외가가 있는 영주로 이사를 와서 줄 곳 영광중학교 뒤에 있는 숫골에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고향은 영광중학교 뒤쪽의 산언덕 같다.”고 말한다. 영주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데생을 잘 하던 어린 판국은 가난한 집안의 4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난 관계로 돈이 많이 들지 않고 쉽게 그릴 수 있었던 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동창생인 이두식(홍익대 미술대 학장)이 그림을 잘 그렸다면 그는 만화를 잘 그렸다. 그는 만화로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었고, 만화를 사랑했다. 영광중,고를 재학 중이던 시절 동기들로부터 “반드시 만화가로 성공을 하라”고 말을 자주 들었다. 그만큼 그는 동기들로부터 만화를 잘 그리는 친구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편이어서 고교 시절 학생회장에도 출마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만화가로 알려져

아무튼 그는 만화를 아주 잘 그리는 학생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평생을 만화를 그리며 살고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만난 고교 1년 선배 홍만주씨가 "갑종간부후보생으로 같이 군대가자"라는 권유에 부산에서 군 입대를 하게 된다.

광주의 보병학교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고 전방부대 소대장을 거쳐 공수특전단 부팀장으로 복무하면서 70년에는 맹호부대 공수지구대 교관으로 월남에도 가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절대로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 결심을 하고 월남에 가서인지 전투에는 여러 번 참가했지만, 사람은 죽이지 않고 귀국을 했다.

당시의 특전사 지휘관들이 대부분 박정희 정권 말기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경호실이나 정부기관의 요직에 앉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전역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아무튼 1974년 초급장교생활을 정리하고 그는 경향신문사의 편집국에 입사를 하게 된다. 그 유명한 시사만화 ‘청개구리’를 이곳에 20년간 그렸다. 물론 틈틈이 전우신문이나 지역신문에도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고, 독실한 기독교인인 관계로 각종 기독교 신문과 잡지에도 만화를 그렸다.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 신문사에 재직하던 시절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 동아신학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전도목사안수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농민신문의 시사만화가로 활동을 하면서, 농민신문기독선교회 지도목사와 주일이면 새문안 교회 등에서 직장인 예배 지도, 성가대 고문목사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월남을 다녀왔지만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역 이후 전우신문에 오랫동안 만화를 그린 것이 공적이 되어 국방부장관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월남 참전과 만화를 그린 것으로 국립묘지에 갈 수 있는 티켓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다.

또한 그는 목사가 되기 전에는 가끔 술도 한잔씩 하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주초등, 영광고 동기회의 총무 일을 맡고 있는 관계로 동기모임이 있을 때면 늘 음식과 술을 주문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아주 고통스럽다고 한다. “목사가 되어서 늘 술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니 남들이 웃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고교 후배인 기자에게는 “다음에 술 한잔 사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술, 담배 같은 것에는 초월한 기독교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현역으로 여러 신문과 잡지에 만화를 그리고 있는 선생은 매일 점심식사는 교회에서 하고는 출근하여, 오후 2시에서 5시까지 종로 1가에 위치한 농민신문사에서 십년째 만화 ‘하나로’를 그리고 있다. 그날그날의 다양한 정보를 읽고 분석하면서 새로운 만화를 그리는 것이 짧은 시간에 혼을 빼는 정신이 없는 일이지만, 30년 넘게 해오는 일이라 조금은 여유로워 보였다. 만화를 그리면서 인터뷰에 대답도 하고 전화도 받고,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농담도 하곤 했다.

지금은 경향신문의 편집인이 된 영주 출신의 김지영 기자 이야기며, 동창생인 시인 박시교, 쌀집하는 진병국씨 등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있게 해 주었다. 고교 시절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떨어진 이야기는 특히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같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인터뷰 해준 대가로 얼마 전 비타민에 대한 만화를 그려주고 받은 비타민 알약을 무려 한통이나 손에 건네주면서 조만간 몇 번 더 만나서 진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즐거움을 주는 목사님으로도 살아가고 있어

아무튼 생각보다 재미있고, 또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라는 것이 말이야. 돈도 많이 안 들고 시간도 많이 들지 않아, 거기다가 신문이나 잡지에 주고 돈 못 받아도 별로 손해나는 것이 없거든. 그래서 오랫동안 그려 온 것 같아. 물론 만화를 사랑하기도 하고” 하기야 만화는 유화를 그리는 것 보다는 시간이나 돈이 많이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쉽지만도 않은 일인데 아주 즐겁게 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낙천적인 성격 같아 보였다.

대학을 못 간 두 아들에게도 “건강하니 다행이다.”라고 말하고 명문대학을 졸업한 딸에게는 “열심히 공부하니 좋다.”고 말하는 편안함이 있다. 3남매 모두 장성하여 지금은 회사원으로 있고, 서른이 넘은 장남과 장녀가 결혼을 하지 않아 걱정이라며 “중매 한번 서”란다.

"MBC코미디언 시험에 도전하여 1차에 합격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는 만화가 김판국 선생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목사님이며, 청개구리 같은 삶을 살아온 시사만화가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다. 슬며시 미소도 선사하는 그런 사람 말이다.

( 만화가 김판국 선생 연락처 011-9711-3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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