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비인칭인 봄

- 박수현

비인칭(非人稱)의 봄이 걸어간다

팬지꽃 심는 아주머니의 엉덩이를 지나

지하도의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황사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지하로 밀려가는 카디건과 스니커즈들

이어폰을 꽂은 뒤통수가 한결같다

파미에 파크, 메가박스, 엔터 식스, 센트럴시티

반품된 시간과 리필된 계절들이

날마다 리모델링되는 곳

입술 없는 얼굴들이, 문수 지워진 발들이

풍선 인형처럼 건들건들 환승 통로를 건너간다

해석되지 않는 애인과의 거리는

내일의 쇼핑 목록에 유보해 둔다

불법 포획된 밍크고래가 대형 스크린을 비행하고

총선 후보들이 유언비어처럼 깜박이다 페이드아웃된다

무빙워크 위에서 어깨를 부딪치다

동시다발 삭제되는 비인칭(非人稱) 봄들

 

재생 버튼을 누른다

지하의 어디쯤 묻힐 발아되지 못할 씨앗처럼

신상 웹을 다운로드 받는 거북목들이

손가락 하트나 날리는 손목들이

다시 삭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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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종일 쉬지도 않고 세찬 강풍이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어 댔다. 창가에 선 산유수나무도 정신없이 흔들렸다. 꽃가지를 꼭 잡고 마구 흔들렸으나 다행히 꽃잎을 잃지는 않았다. 어렵게 어렵게 봄이 왔는데, 꽃을 피웠는데, 세찬 바람에도 나무는 꽃잎을 지켰는데, 올 봄 사람들은 그 꽃나무를 쳐다 볼 여유가 없다. 더 다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걱정거리가 봄을 즐길 조금의 마음조차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입술 없는 얼굴들이’ 마스크를 끼고 겨울보다 더 추운 모습으로 ‘지하의 어디쯤 묻힐 발아되지 못할 씨앗처럼’ 회색도시를 살아간다.

황사보다 더 무시무시한 코로나 19여. 삭제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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