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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수의 잊혀진 영주역사이야기[78] 순흥의 봉서루(鳳棲樓)류창수(전 영주문화원 이사)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20.03.26 17:26
  • 호수 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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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은 봉황이 날개를 펴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고려시대의 어느 날이다. 풍수지리를 잘 아는 한 나그네가 순흥땅을 지나다가 고을의 지형과 산천을 유심히 살펴보고 <여기는 지형으로 보아 매우 번성할 수 있는 고을인데, 비봉산의 봉황이 날아 가려하고, 고을의 남쪽이 허(虛)하니 흠(欠)이로구나.>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고장 사람이 그 흠이란 것을 메울 수 있는 방도를 나그네에게 물어보았다. 그 나그네가 하는 말이 <남쪽 5리쯤에 누각을 세우고, 둘레에는 오동나무를 심어 오동나무숲을 가꿀 것이며, 그 가까이 알 모양의 봉우리를 세군데 쯤 만들어 두면, 봉황이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형의 허술함도 메우게 되니, 그렇게만 하면 고장에 운이 열려서 큰 인물들이 나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남쪽 5리 지점(지금의 석교리)에 누각을 세우고, 이름을 봉서루(鳳棲樓)라하고, 그 둘레에 오동나무를 심어서 숲을 조성하였으며, 그 가까이에 흙을 모아서 동그랗게 쌓아올려 세 곳에 알 봉을 조성하였다. 용, 거북, 기린과 함께 상서로움의 상징이 되는 봉황은 본래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 대나무 열매)이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 중국의 태평시대에 단물이 솟았다는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았다고 하며, 봉황이 깃든다는 뜻으로 누각을 봉서루라 했고, 봉황이 깃들도록 오동숲을 가꾸었으며, 봉황의 알까지 만들어 놓아서 봉황이 다른 곳으로 마음을 두지 않고 여기서 안주하게 만들어 놓았다.

1317년경(충숙왕4)에 고장 출신인 안축(1287년~1348년)선생이 벼슬길에 있다가 잠시 고향에 내려와서 머무는 동안 봉서루에 올랐는데, 누각이 몹시 퇴락하여 무너질 지경이었다.

그해(1317년) 채상이 순흥고을 수령으로 부임해서 봉서루를 중건하였는데, 규모가 웅장하고 단청이 새로워 영남에서는 견줄만한 누대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남의 3대 명루는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를 말하지만, 영남루와 촉석루는 고려말경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영호루는 공민왕 때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하니, 그중에 영호루가 가장 앞서는데, 모르긴 하지만 순흥의 봉서루는 그 중건 연대가 영호루보다 앞서고, 규모 역시 컸던 것으로 보인다. (중건 연도를 살펴보면, 영호루는 1367년 공민왕 때이고, 봉서루는 1317년(충숙왕4)이다.)

고려 후기로 접어들면서, 순흥에는 역사에서 빛나는 훌륭한 인물들이 이어졌다. 1243년(고종30) 주자학의 비조인 회헌 안향 선생을 비롯 고려 말 문장가이며 정치가인 안축 선생, 대제학으로 명성이 높은 안보 선생, 순흥군으로 봉해진 안집 선생은 순흥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봉서루와 오동나무숲이 있던 자리에는 1920년도 이래로 허허벌판이 되어서 다만, 알봉만이 논 가운데 옛 모습대로 남아있을 뿐, 울창하던 오동나무숲은 간곳이 없고,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옛 사연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순흥면사무소 경내에 있는 봉서루는 1930년 왜정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참고문헌. 順興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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