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7] 공민왕 몽진 길

공민왕은 아버지의 태(胎)가 묻힌 순흥으로 몽진 길 떠나
부석면 어래산·왕비골·안심천, 평은면 왕머리 지명 남기고
무량수전, 흥주도호부아문, 봉서루, 기주절제아문 편액 남겨

공민왕 몽진길(개경-순흥-안동)
2-공민왕 몽진길 영주구간(어래산-왕머리)
‘어래산’-부석면 남대리

공민왕, 출생에서 몽진까지

공민왕(고려 31대왕)은 1330년 충숙왕(忠肅王, 27대왕)과 명덕태후(明德太后)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충혜왕(忠惠王, 28대)과 조카 충목왕(忠穆王, 29대), 서조카 충정왕(忠定王, 30대)에 이어 1351년(21세) 왕위에 올라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한편 개혁을 시도했다.

1361년(31세)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공민왕은 몽진(蒙塵, 임금의 피란)길에 오르게 됐다. 11월 19일 개경을 떠날 때 얼마나 다급했으면 말을 탈줄 모르는 공민왕이 말을 타야했고, 노국공주도 연(輦,임금의 가마)을 버리고 말을 탔다.

공민왕 일행이 개경을 출발하여 옛 고구려의 남진 길을 따라 충주-음죽(이천)-단양을 지나는 동안 백성들은 산성으로 떠나고 관리는 전장에 나가는 바람에 왕을 맞이할 사람이 없었다.

순흥을 향해 떠난 몽진길은 험준한 소백연맥이 철옹성(鐵瓮城)을 이루고 있는 남대궐(南大闕,남대리)에 다다랐다. 남대리 주변 곳곳에는 임금님이 찾아왔다는 어래산(御來山)을 비롯하여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머문 곳), 행궁(行宮, 임금의 임시처소)터 등이 남아있다. 부석면 남대리에서 평은면 왕머리까지 (영주땅) 130리 몽진길에는 王이 남긴 어필(御筆)이 있고, 전설과 지명을 남겼다.

 

고려왕실과 친했던 ‘순흥’

순흥은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급벌산군’이라 했고, 통일신라 때(742)는 ‘급산군’이라 불렀다. 고려 초에 흥주(興州)로 고친 후 성종 때(981) 순정(順政)으로, 현종 때(1009)는 안동부에 속했다가 뒤에 순안현(順安縣, 고려 때 영주)에 속했으며, 명종 때(1170)는 감무를 두는 등 작은 현(縣)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274년 충렬왕(忠烈王, 25대)의 태(胎)를 순흥에 묻고 흥녕현령(興寧縣令)이 되고, 1313년 충숙왕(忠肅王, 27대)의 태를 간직하고 지흥주사(知興州事, 군급)에 올랐으며, 1344년 충목왕(忠穆王, 29대)의 태를 안치하면서 순흥부(順興府)로 승격했다.

첫 번째 태를 묻은 충렬왕은 공민왕의 증조부이고, 두 번째 태를 묻은 충숙왕은 공민왕의 아버지이며, 세 번째 태를 묻은 충목왕은 형의 아들이다.

도성(都城)을 버리고 몽진길에 오른 공민왕은 ‘어디로 가야할까?’ 고심 끝에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태가 묻힌 ‘순흥땅’이 머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순흥을 몽진처로 정한 이유는 또 있다. 당시 순흥 출신 안향(1243-1306)은 1286년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 왕인 충선왕을 모시고도 원나라에 갔다 왔다. 또 안향의 3종손(三從孫, 6촌의 손자)인 안축(1282~1348)은 1323년(충숙왕10) 원나라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국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동생 안보(安輔, 1302-1357)는 공민왕 원년부터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종2품)으로 공민왕을 보필했다. 또한 몽진 당시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관찰사)로 있던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 1325-1394)은 몽진을 위한 첩경(捷徑)을 닦은 인물이라고 역사에 나온다. 이와 같이 고려왕실과 순흥은 아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부석면 임곡1리에 있는 ‘왕비골’ 상상도

공민왕의 피난처 ‘왕비골’

부석 사거리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500여m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 한그루가 있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1.5km가량 올라가면 임곡1리 숲실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3km가량 올라가면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피난했다는 왕비골이 있다.

이 전설의 왕비골은 공민왕 몽진 때 축조된 ‘남대궐’의 ‘행궁(行宮)’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고 송지향 선생이 쓴 향토지에 보면 「공민왕의 피난처로 추정되는 임곡석성은 어귀에 깎아지는 듯 암벽이 동서로 마주보고 솟아 천연성문을 이루고 있다. 동남향으로 열린 자연성은 천험(天陜)의 산줄기로 둘러막혀 있으며 골짜기 안은 상당한 넓이로 평탄한 터전인데 무너진 축대와 기왓장들이 있다. 숲실 사람들은 “공민왕이 피난한 자리”라고 말한다. 사면을 에워 두른 산줄기는 바깥 면이 가파르고 험한데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된 성벽이 지금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서북쪽 정상 가까이로 능선을 넘어서면, 수십 길 위태롭게 솟은 바위가 있으니 바로 ‘망바위’다. 군사들이 이 바위에 올라 망을 보던 곳이라고 한다. 망바위에서 북쪽으로 비탈을 돌아 더 올라가면 ‘왕비골(王妃谷)이라는 깊은 골짜기가 있는데, 천 길 낭떠러지 안쪽에 자리 잡은 이곳에 노국공주가 피난한 곳이라 하여 ‘왕비골’이라 부른다」고 기록했다.

김원상 임곡1리 이장은 “왕비골은 산이 험준하고 산돼지 출현 위험이 있는 곳”이라며 “우리 마을에 사는 60대 이상은 나무하러 다녔던 곳이기에 왕비골의 지형을 잘 알고 있다. 인공으로 쌓은 성벽 일부가 남아있고 궁터의 흔적으로 축대와 기왓장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곳이 ‘행궁터’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익(75) 부석사정토회장은 “공민왕 피난처로 알려진 왕비내는 성문, 성안, 망바위, 왕비골로 구분 한다”며 “천연자연석이 마주보고 있는 성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행궁지(行宮趾)로 추정되는 넒은 터가 있는데 축대와 기와장이 보인다. 높이 30m쯤 되는 망바위에 올라서면 영주시내까지 훤히 내려다보인다. 망바위에서 1km 가량 더 올라가야 깊고 험한 ‘왕비골’이 나온다”고 말했다. 김우현 전 이장은 “왕비골은 70년대 초까지는 나무꾼들로 붐볐다”며 “왕비골에서 흐르는 물을 ‘왕비내’, 임금이 잠시 머물렀다는 행궁터, 군사가 망을 본다는 ‘망바위’, 우뚝 솟은 봉은 ‘투구봉’ 등 공민왕과 관련된 지명이 여럿 있다”고 말했다.

 

‘왕의 샘’ 부석면 소천2리

부석 진골에 있는 ‘王의 우물’

공민왕 일행은 그 해 추운 겨울 소백준령을 넘어 도착한 곳이 순흥부 안심동이다. 현 부석초 뒤편 소천2리 마을회관 인근이 안심동(安心洞)이다. 여기를 안심동이라 한 것은 공민왕이 무사히 순흥땅에 도착하여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하여 ‘안심동’이란 지명을 남겼다.

향토사연구가 진세환(75, 부석 진골)씨는 “임곡의 한학자 고 진병수(秦柄壽) 선생께 들었다”면서 “공민왕이 홍건족의 난을 피해 순흥으로 거보(去步)하면서 엄동설한에 남대리-마구령을 지나 이곳에 이르니 겨울인데도 따뜻한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어 말에서 내렸다. 왕이 직접 천수(泉水)를 마시면서 ‘이제야 안심이다’라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후 이 고을 사람들은 왕이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하여 ‘안심천(安心泉)’, 왕이 눈물을 흘린 샘이라하여 ‘왕의 눈물’ 등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진 씨는 또 “저의 선친(秦得龍)과 아주 친했던 고 이재현(李在鉉)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며 “1960년대까지 매년 정월대보름날 자시에 동샘(安心泉) 뒤 언덕(眞骨山 牛頭磐石)에 동민 다수가 모여 천수(天水)를 정화수로 천제(天祭) 지낸 미풍양속이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공민왕 어필 ‘무량수전’ 편액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
‘봉서루(鳳棲樓)’ 편액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衙門)’

공민왕의 어필 무량수전 편액

공민왕 일행은 마구령을 넘어 부석사 앞을 지나면서도 부석사에는 들리지 못했다. 고려 왕실은 부석사와 매우 친했다. 1016년(현종7)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는 등 열성조의 융숭한 대우를 받은 부석사이다. 그럼에도 부석사에 들리지 못한 이유는 1357년(공민왕6) 왜구의 침입으로 무량수전이 전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흥부 관아에 도착한 공민왕은 부석사 무량수전이 무량하기를 기원하면서 편액을 직접 썼다고 한다.

무량수전 현판 이면에 보면 「粤 在新羅 儀鳳元年 創建浮石寺 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월재신라 의봉원년 창건부석사 금당제자 공민왕지친필야) 지난 신라시대 의봉원년(676년 唐 高宗 儀鳳元年 丙子)에 부석사를 창건하였다. 금당(부석사)에 쓴 글자는 공민왕이 친히 쓴 것이다」라는 묵서명이 있다. 공민왕이 쓴 이 편액은 1376년(우왕2) 원응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수한 기념으로 걸었는데 그 편액이 지금까지 걸려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편액 중 가장 도래된 편액으로 꼽힌다. 공민왕은 순흥에 머무는 동안 순흥부 관아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 풍기군 관아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衙門)’ 순흥 ‘봉서루(鳳棲樓)’ 편액 등 어필(御筆)을 남겼다.

 

‘순흥부 관아’, 현 순흥면사무소
왕이 머물다간 ‘왕머리’ 마을전경
왕머리에 있는 ‘왕의 우물’

‘순흥’이 너무 추워 안동으로

공민왕이 순흥부 관아에 머무는 동안 왕은 “순흥의 겨울이 너무 춥구나!”라고 했다.

그래서 안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순흥부를 출발한 공민왕 일행은 영주를 지나 안동방향으로 향했다. 당시 영주는 고려 초 강주(剛州)-순안(順安)으로 부르다가 고종45년(1258) 위사공신 김인준(金仁俊)의 고향이라 하여 영주(榮州)로 고치고 지영주사(知榮州事)를 두었을 때다.

일행은 평은역-송리원을 지나 학가산 줄기에서 가장 낮은 두문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높고 긴 고갯길을 오르다가 고갯마루 아래 우물이 있어 왕은 말에서 내린다. 공민왕은 바가지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신 후 노국공주에게 권한다. 공주는 지친 모습이 역력했으나 감로수를 마신 후 힘을 얻어 두문재를 넘었다고 전설은 말한다.

그 후 이 마을 사람들은 왕이 머물다 간 곳이라 하여, 임금 왕(王)자에서 ‘왕’자를 따고 머무를 유(留)자에서 ‘머’자를 따 ‘왕머리(王머里)’라고 불렀다. 세월이 흘러 조선 말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왕유동(王留洞)이란 이름을 가지기도 했다. 지금도 왕머리에 가면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물을 마셨다는 ‘왕의 샘’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공민왕의 파란만장한 생애

공민왕 몽진길은 영주구간 130리 길을 지나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갔다고 한다.

1362년 1월 홍건족을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하여 1362년 2월 안동을 출발하였으나 장수들의 권력다툼, 흥왕사의 변, 문신과 무신의 대립과 갈등 등으로 왕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머물다 1364년(공민왕13) 최영·이성계 장군이 난을 평정하고 정국을 수습한 후 입궐이 가능했다. 1364년(공민왕13) 노국공주가 태기를 보였다. 1365년(공민왕14, 35세) 2월 노국공주는 난산으로 아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비탄에 잠긴 공민왕은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은 채 음주와 광태로 불행한 삶을 살다가 1374년(공민왕23. 44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