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시조시인·본지논설위원)

의심은 몸속의 암과 같아서 뚜렷한 징후 없이 나타난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친구는 죽음의 순간까지 병명도 모른 채 온갖 항암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뒀다. 최초의 병명은 폐암으로 몇 차례 항암치료로 완치가 되었다더니 결핵성 피부암으로 다른 병원에서 확진을 받고 방사선치료를 받았으나, 정확한 진단이 아니었다. 마지막에는 다른 병원에서 국내의 의학으로는 실체를 밝힐 수 없다하여 스스로 퇴원하고 집에서 버티다가 숨을 멈췄다.

그래도 유족은 의료진이 ‘합리적 의심’으로 진단하고 치료했으리라 믿는다. 그렇지만 필자는 의심한다. 의료진이 그 어떤 진실, 그 어떤 실체가 드러나도 무시해 버리고 최초에 암이라고 진단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고. 최초의 진단이 믿을만하고, 암세포가 꿋꿋하게 스스로 변형되었다고 의심한 게 아닐까? 의심은 자체의 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헌정사상 유례가 없는 대통령탄핵을 이끌어낸 최초의 의심은 세월호의 침몰이었다. 대통령의 불통에 낙심한 정치권과 대중은 ‘잃어버린 7시간’에 관한 온갖 의혹으로 불신을 증폭시켰고, 몇몇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모든 원죄가 청와대로 향했다. 의심의 기술이 대중과 정치인의 공동 작업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세월호 침몰을 가지고 가장 황당한 장난을 친 사람들이, 서울시장과 네티즌 수사대로 유명한 ‘자로’였다. 자로는 지난해 말 최고의 상상력을 발휘해 장시간의 동영상 다큐를 만들어 ‘세월호와 잠수함의 충돌 가능성’을 또렷하게 주장했다. 서울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트위터에 “네티즌 자로가 오랜 인고의 시간 속에 찾은 진실에 우리는 답해야 합니다”는 글을 올렸다(2016년 12월 26일). 세월호의 실체가 전면적으로 드러나 갈 곳을 잃은 현재에도 ‘잠수함 충돌설’은 식지 않는다. 잠수함과 부딪쳤다면 세월호 몸체가 저렇게 유지될 수 없음에도 의심은 관성을 가지고 살아있다. 청해진 명의로 등록된 세월호의 실제 소유주에 대해서도 “나는 세월호가 국정원의 소유임을 확신한다”고 페이스북에 쓴 사람은 현 경기도지사이며 (2014년 12월 28일). 국정원에 의한 고의 침몰설을 주장했다. 밑도 끝도 없이 떠돌았던 의심이었다. 대권을 바라보던 책임 있는 정치인이 의심을 증폭시켰고, 세월호가 물 밖으로 나온 지금도 거기에 대한 어떤 해명도 없다. 물론 그들이 광장이나 네티즌, 평론가의 입에서 나오는 음모론에 일일이 반응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란 것을 알겠노라고 왜 밝히지 않는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게 공인의 도리라는 걸 모르는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정치의 기술을 키워야 하지 의심의 기술을 갈고 닦다니 참 곤란하다.

하기야 우리 정치판의 음모론은 오래전부터 선진 일류였다. 아직까지도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의혹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제주 4.3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통진당 해산에도 풀리지 않는 의혹은 있다. 법원의 판결로 해소되지 않는 ‘의심 기술’의 발전 속도는 4차 산업혁명보다 빠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의심의 기술은 ‘광장 민주주의’와 함께 2017년 5월 이후의 한국을 특징짓는 키워드임에 분명하다. 세월호는 3년 만에 한국인의 눈앞에 드러났고, 처참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이어도 의혹은 멈출 줄 모른다.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지니 이렇게 빨리 떠올랐다 하고, 진실을 감추려고 그동안 정부가 막았기 때문이라거나, 감춰야 할 게 있었다는 등, 늦어도 음모요, 빨라도 의심이다. 도대체 선체 인양을 언제 해야 했나?

인기 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썰전의 유작가는 음모론에 대해 “그 사람들이 나쁜 의도가 있어 지어냈다고 보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 뒤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다른 시나리오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3월 30일 JTBC ‘썰전’). 그의 말은 그럴듯하지만 궤변이다. 나쁜 의도가 없어도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는 수없이 많았다. ‘지옥으로 인도하는 길은 선의(善意)로 가득 차 있다’는 서양 속담이 여기에 해당한다. 근래에는 증거인멸과 증거보전을 착각한 발언으로 다시 유명세를 탔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더 이해할 수 없는 음모론을 들고 나오면 그의 지성은 보잘 것 없다. 음모론을 직업처럼 퍼뜨리는 사람들은 음모라는 표현보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근사한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도 비합리적인 억측일 뿐이라는 게 조금 늦게 드러난다. 아직까지도 탄핵에 반대하는 세력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리그에 의혹을 증폭시킨다. 자기들끼리만 합리적 의심이라는 용어로 서로 격려하고 부추기고 있으니 나라가 시끄럽고 어지러워졌다. 이런 풍토에서 음모는 문화로 정착하기 십상이다.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은 새로운 의심과 음모론을 쏟아낸다. 오래 지속되는 의심은 알게 모르게 규범이 되고 만다. 새로운 의혹의 제기는 어느새 미덕으로 칭송되기 십상이다. 발전된 의심의 기술은 광장 민주주의도 촛불혁명정신도 어둡게 만들 수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애초의 관성대로 새 음모론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음모론이 세상의 햇빛에 노출되는 순간 사라진다는 말처럼 비현실적인 게 없다.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정부가 투명하지 않아 창궐한다는 ‘음모론 환경설’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의심과 음모론은 코로나 19같은 곰팡이도 전염병도 아니다. 의심하는 버릇 때문일 확률이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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