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전 영주문화원 이사)

풍기인견(豊基人絹)은 레이온 사(絲)(목재펄프)와 린터(면화에서 섬유를 뽑아내고, 남아있는 3~5mm의 짧은 섬유)사(絲)로 만든 천연옷감이다. 일명 인조(人造)라고도 하며, 다른 옷감에 비해 얇고 부드러우며 몸에 붙지도 않고 촉감이 실크와 같아서 인기가 높은 옷감이다.

근간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여름철의 나들이 의복과 어린이들의 의복과 잠옷, 침구류 등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풍기직물이 가내공업으로 출발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기까지는 험준한 길을 걸어왔다. 지금부터 그 역사를 살펴보자.

풍기직물(織物)이 소규모의 기업 형태로 변모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대 초 무렵이었다. 구한말 이래, 평안도 사람들이 풍기로 와서 정착을 할 때, 미리 와서 기반을 잡고 살던 사람들에게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상업적인 기반을 잡았으며, 상당한 재력도 구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풍기의 직물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들도 그들이다.

평안도 삭주 출신인 김형석, 평양출신인 김필주 등이 풍기직물의 개조(開祖)였으니, 이들은 3.1독립운동 무렵에 풍기로 이주해 자리를 잡고 살면서, 상당한 토지와 주조조합(酒造組合)을 경영하는 등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직조공장도 설립하였는데, 장소는 동부동 풍기교회 앞 언덕 밑이었다. 직조공장만이 아니고 누에고치로 실을 뽑는 생사 공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니, 규모는 대단치 않았으나 소규모의 방직공장이었다.

소형 목조기계 수십 대를 설치하고 소폭명주를 생산하였다. 1930년대 말경, 이종순이 서문거리 단양통로 쪽(천주교위)에 역시 명주공장을 차렸으며, 그보다 수년 뒤에 평안도 덕천에서 갓 이주한 송석홍이 동부동에 공장을 차리고 명주 항라(亢羅)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송석홍의 공장은 지금 <통일직물>자리이다. 그는 본래 고향에서도 직조업을 했던 듯 경영에 밝아서 공장을 크게 번창시켰는데 일본이 패전할 무렵 원료가 끊겨 문을 닫았었다.

풍기에 인견직이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1948년경이다. 이응두(왜정 때 평안도에서 이주한 사람)가 인견직이 미리 개발된 강화도에 가서 개량식 베틀 7대와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본견직(本絹織)에서 인견직으로 전환을 하였다. 인견직이 자리를 잡을 무렵,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휴전이 된 후 풍기의 인견공장은 급속히 발전을 하였다. 당시의 풍기 직조사업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의 직조공장 시설들이 불타고, 파괴되어 생산이 중단되었으나 풍기는 다행히도 시설에 큰 피해가 없어서 밤낮으로 물량생산에 들어갔다.

전국 각처에서 장사꾼들이 물건확보를 위해 구름같이 몰려와서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심지어 베틀머리를 지키고 있다가 물건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두어 가는 형편이었다. 수년 사이에 풍기에 베틀이 무려 3천대가 불어났으며 풍기인견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상품이 되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도시의 큰 기업들이 시설을 현대화하고 대량으로 신제품을 쏟아내니 풍기직물업계에서는 한동안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풍기직물을 살리기 위하여 시설을 현대화하고 품질향상과 고급화에 최선을 다했다. 특히 경영개선에 경주(傾注)한 결과 최고의 품질인 풍기인견을 생산하게 되었다. 오늘도 풍기인견은 더 좋은 품질 생산을 위해 연구와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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