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석희

‘새 하늘과 새 땅’은 신약성서의 마지막 장(章)인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이다. 신약성서 가운데 유일한 예언서인 그 책을 가톨릭에서는 『요한묵시록』으로 부르기도 한다. 영어 제목 『Revelation to John』, 즉 ’요한에게 보여주심‘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1세기 후반 에게 해(海)의 파트모스(밧모) 섬에 유배 중이던 예수의 열두 사도(使徒, apostle) 중 하나였던 요한에게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을 기록한 책이다. 오늘날 영화나 문학작품 등에서 종말이나 대재앙 등의 뜻으로 흔히 사용되는 그리스 말 ’아포칼립스(apocalypsis)‘ 역시 묵시(묵示)를 의미한다.

‘새 하늘, 새 땅’이라는 제목에서 ‘신천지(新天地)’를 떠올리셨으리라. 사실 신천지라는 종교집단의 주장대로 그들도 감염병의 희생자임에는 틀림없지만 바이러스의 폭발적 확산의 단초를 제공한 그들의 포교나 예배 방식 그리고 그들의 감염병에 대한 비협조적 대응방식이 사람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많은 신흥종교들이 그들의 교리를 『요한계시록』에서 따오는 것은 그 책이 환상이나 상징, 비유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자의적(恣意的) 해석의 여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 속에 등장하는 14만 4천이나 666 등의 숫자들은 자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상징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본디 유한(有限)하고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민중들의 삶은 고단하고 신산(辛酸)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언제나 민중들을 매료시켰다. 삼국시대의 사람들은 미륵의 세상을 기다렸고 조선말의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천도교의 개벽(開闢)의 세상을 꿈꿨다.

이단(異端) 논쟁의 역사는 길다. 중세 십자군의 원정도 이단전쟁이었고 마녀사냥으로 불 속에 던져진 수많은 여인들도 이단재판의 희생자들이었다. 이단(異端)이라는 것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가경영의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 초기에 유교가 아닌 불교나 도교를 이르는 말이었다. 단(端)이라는 한자는 ‘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단정(端正)하다’라는 말에서처럼 ‘바르다’라는 뜻도 있는 터여서 ‘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뜻으로 이단(異端)이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는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영어의 ‘heresy’가 그대로 이단으로 번역된 것이다. ‘사이비’라는 말도 그와 비슷하다.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을 문자 속 그대로 풀어보면 ‘비슷하지만 아니다’라는 뜻이 된다. 이 말의 연원은 2500년 전 중국의 전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자가 왜 사이비를 미워했느냐(孔子曰惡似而非子)”는 제자의 질문에 맹자가 대답한다. “말만 많은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신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정나라의 음란한 음악을 미워하는 연유는 아악(雅樂)을 더럽힐까 두려워서이고, 자줏빛을 미워하는 것은 붉은빛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통 개신교에서 이단을 규정하는 여러 기준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교주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와 시한부종말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스스로를 신격화한 수많은 교주들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절대자가 되어 교인들을 조종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며 맹목적인 추종자들을 양산해 사회문제들을 일으켜왔다. 부활한 예수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며 분명히 다시 오기는 올 건데 그게 언제일지는 나도 모르고 내 아버지(하나님)도 모른다고 말씀했지만 수많은 교주들이 시한부종말론으로 신도들의 불안과 공포를 부추기며 그들의 영혼을 파괴해왔다.

지금 우리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천지의 정식명칭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이라고 한다. 60년대 경기도 과천에 유 아무개라는 열여덟 살의 교주가 만든 것이 장막성전이었다. 그 역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인물로 시한부종말론을 펼치며 1969년, 세상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거라고 했지만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천지의 이만희 씨도 그 장막성전에 적을 두었었다고 하는데 확실한 사실은 아니고 분명한 것은 장막성전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성도가 14만 4천이 되면 마지막 날이 오고 인(印, 도장) 받은 그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기본교리가 빼닮은 것은 사실인 듯하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믿음에 기반을 둔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초월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종교의 본령(本領)이라고 믿는다. 물론 ‘스스로의 믿음이 이성(理性)에 반(反)하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파스칼의 『팡세(Pensees, 생각)』의 한 대목을 전제로 하고서 말이다. A.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은 종교는 희망과 공포를 부모로 두고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릇된 희망과 강요된 공포로는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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