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만나는 꿈의 통로

우리 이웃사람들의 번영은 결국 우리들의 번영이다. -J. 러스킨

2020년 시가지 ①영주초 ②분수대 ③국민은행 ④농협은행 ⑤상가시장 ⑥한성약국 ⑦영주지하도
(촬영 이영규 기자)

번영로는 영주초등학교 앞에서부터 분수대, 농협은행, 영주지하도, 석미모닝파크를 지나, 구성로와 만나는 영주제일주유소(흥구석유) 앞 삼거리까지이다. 예전엔 안동통로였지만, 구성로가 만들어지면서 구 안동통로가 되었다. 번영로라는 이름은 2008년 새롭게 도로명이 만들면서 지었다. 옛 시가지 중심도로로서 ‘새로이 번성하고 세상에 영화롭게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1968년 영주에서 최초로 포장이 된 이 길은 아직까지 신한은행(구 조흥은행), 국민은행, 대구은행, 농협 등 금융권이 밀집해 영주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1954년 시가지 ①영주초 ②영주극장 ③합승정류장 자리 ④농업 창고 ⑤옹기전 ⑥원당천 다리

1954년 영주시가지

1954년 사진에 은행 한 곳이 보인다. 현재 분수대 옆에 있는 조흥은행(신한은행)이다. 분수대 자리에 집의 흔적이 보인다. 60년대까지 상가가 있었다. 또 분수대 왼편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현재 주차장이 되어버린 영주극장이다. 좀 더 자세히 보면, 현 국민은행의 자리는 공터이다. 이 공터에서 영주여객이 시작된다. 롯데리아 자리도, 태극당 자리도, 농협 자리도 빈터이다. 농협 뒤에 있는 창고는 농업창고인데, 1970년이 되어 상가시장이 지어진다. 그리고 현 한성약국 앞 사거리의 오른편에는 옹기점 가는 길이고, 왼편 길은 나무전 골목이었다. 길의 형태는 현재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현재와 현격하게 달라진 것은 철길과 물길이다. 철길과 물길이 도로(道路)로 바뀌었다. 사진 속의 영주역이 1973년 현재의 영주역으로 옮기면서 철길은 구성로로 바뀌었고, 원당천이 1982년 경일미래타운 쪽으로 수로를 돌리면서 하천이 원당로가 되었다.

 

스쿨서점(1961년)(현 코코호도 자리)
수해복구비

분수대, 시가지의 중심

시가지의 번창은 인구의 변화와 비례한 것 같다. 영주의 인구는 131,625명(1960년), 160,085명(1970년)으로 증가하다가 175,444명(1974년)이란 정점을 기록하고, 1980년 영주시 승격 이후 감소하기 시작한다. 시가지의 변화 즉, 새 건물이 지어지는 시기도 거의 이 시기이다. 2019년 영주의 인구는 105,746명이다.

분수대 뒤편에 사자상이 있다. 거기에 1981년 영주라이온스클럽에서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수해복구기념비’가 있는데, 비각의 높이가 1961년 영주수해 때, 시가지를 덮은 물의 높이라고 한다. 비각 높이에 눈을 맞추어본다. 건물의 1층 정도가 물에 잠긴다. 분수대 자리엔 “○○양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영주 일류 양품점(洋品店)들이 있었다. 지금 주차장이 되어버린 영주극장은 일요일 오전에 문화교실을 열었다. 그 문화교실에서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TV가 없던 시절, 영화는 우리들에게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또 다른 문화 공간은 서점이었다. 신한은행 뒤편엔 아직까지 남아있는 주변에서 가장 오래된 2층 건물이 있다. 지금은 국민은행 옆으로 자리를 옮긴 ‘스쿨서점’이 있던 곳이다. 돈이 귀하던 시절, 서점은 아무나 갈 수 있던 곳이 아니었다. 누가 책을 구입하면 돌려가며 그 책을 읽곤 했다. 그래서 스쿨서점은 우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국민은행의 자리는 합승정류장이었다. 합승은 면(面)으로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합승은 버스보다 작아서 키 큰 어른들은 허리를 굽히거나 아니면 천정에 있는 환기구에 머리를 내놓아야 했다. 이 합승정류장은 시내버스승차장이 있는 진선미화장품 자리로 위치를 옮겼다가 현재 영주여객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된다. 국민은행은 1963년 현 ‘엔젤스커피점’ 자리에서 시작하였는데, 현재의 자리에 새 사옥을 지어 현재까지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국민은행 옆에 은하다과점이 있었다. 은하다과점은 여름마다 특별한 얼음과자를 만들었다. 다른 아이스케키는 단맛이 나는 길쭉한 ‘아이스케키’였는데, 여긴 하얀색의 납작한 직사각형이었다. 우리는 이 얼음과자를 ‘하드’라고 불렀다.

 

상가시장 한복집 골목

상가시장과 새시장

농협은행 앞 사거리에서부터 안동통로의 시작이다. 농협 뒤, 상가시장은 1970년 준공되었다. 1층은 가게, 2층은 살림집인 주상복합의 형태였다. 큰길가에는 양복점, 양장점, 약국이 들어섰는데, 안쪽으로는 한복집들이 자리를 잡았다. 1985년, 결혼식을 준비하며 한복을 맞추려 이 골목길에 와서 깜짝 놀랐다. 한복집도 화려하고 컸지만, 이 골목 전체가 한복집이었고, 이불 가게였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가 않다. 결혼 혼수의 필수품이었던 한복과 이불이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한창 결혼을 했던 시기와 맞물려 그렇게 흥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많다. 한 집 건너 한 집이지만, 옛 자리를 지키며 장인으로서 전통을 고수한다.

상가시장 길 건너편에 눈에 익은 간판이 있다. 914번이란 전화번호가 이름이 된 ‘구일사’이다. 체육시간에 필요한 운동기구를 사기도 했지만, 명찰을 새기는 곳으로 더 기억한다. 중학교 입학 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명찰을 새기는 모습을 보았다. 명찰 하나를 그냥 ‘드르륵’하며 만들어냈다.

한성약국을 지나면 오르막이었다. 지금은 길이 되면서 평지가 되었지만, 예전엔 원당천 둑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늘 복잡했다. 원당천 건너편으로 가는 유일한 다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르막길 오른편에도 시장이 있었다. 예전에 옹기전이 있었던 자리에 새로 상가가 지어지고, 그릇가게가 들어섰다. 영주공설시장이라 했지만 우리는 새시장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채소전 어물전이 있었던 365시장과 차별하여 그렇게 부른 것 같다. 현재는 공설시장과 상가시장을 모두 합쳐서 소백쇼핑몰이라 이름을 지었다.

 

학교 가는 길

1960년대만 하여도 원당천 다리를 지나면 주변에 논밖에 없었다. 왼쪽으로 논 너머 멀리 동부국민학교와 영주중학교가 보였다. 그리고 좀 더 가면 성냥공장이 있었다. 석미모닝파크아파트가 들어선 이곳은 철문만 커다랗게 보였던 소리 없는 공장이었다.

등굣길에 원당천다리를 건너면 학생들뿐이었다. 영주중학교와 대영중학교 때문이었다. 두 학교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길 양쪽으로 줄을 서서 걸었다. 좀 더 가까운 영주중학교는 왼쪽으로, 좀 더 먼 대영중학교는 오른쪽으로 걸어가다가 성냥공장 앞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그리고 면(面)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대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이 친구들의 가방 몇 개를 자전거 핸들에 걸고 달리는 모습은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1971년 늦은 가을쯤이었다. 논 한가운데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하교 할 때마다 우리는 그 집이 변해가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나무집만 흔했던 시절, 시멘트로 집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그 빈집을 들여다보며 ‘참 이상한 집이네’라고만 생각했다. 몇 해 후, 구성로가 생긴 후에야 그 집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그 집은 주유소였다. 그렇게 시멘트철골구조의 휴천동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학교 가는 길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변해 갔다. 우리가 이 길 위에서 꿈을 키우면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에도, 사회에서 제자리를 잡아갈 때에도 그 길은 그 길대로 번영하고 있었다.

김덕우·작가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