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소설가·본지논설위원)

‘수호지’나 ‘로빈 후드’ 같은 소설을 들추지 않더라도 부정을 일삼는 고위관리는 동서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있었던 모양이다. 탐욕스럽고 추악한 관리를 의미하는 ‘탐관오리(貪官汚吏)’라는 말도 근원을 알 수 없이 오래전에 생긴 어휘가 아닐까 싶다. 여러 명목의 세금을 불법으로 가혹하게 거두어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가렴주구(苛斂誅求)’라는 말 역시 탐관오리 못지않게 오랜 내력을 지닐 것 같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춘향전’에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금술잔의 향기로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 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옥쟁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 燭淚落時 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촛불의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 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노래소리 드높은 곳에 백성의 원망 소리 높더라)

라는 암행어사 이몽룡이 탐관오리 변사또의 생일잔치에서 읊은 한시가 나온다. 원님 아들 이몽룡과 퇴기의 딸 성춘향의 신분을 넘어선 사랑이 주는 감동과 함께 악행을 자행하는 변사또가 파직당해 통쾌하기에 춘향전이 고전소설 가운데 백미가 되었을 것이다.

지위 높은 공직자의 부정이 극심하면 형벌 또한 엄할 수밖에 없다. 상(商)나라를 비롯한 고대 중국은 부패한 관리를 ‘팽형(烹形)’이라는 형벌에 처했다. 팽형은 커다란 가마솥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펴 펄펄 끓인 다음, 죄인을 넣어 솥뚜껑을 덮고 삶아 죽이는 벌이다. 산 사람의 사지를 뜯어 죽이는 능지처참보다 더 두려운 극형일 듯하다. 옛날 일본에는 벌건 불꽃이 솟아나는 화산에 죄인을 던져 버리는 형벌이 있었고, 독사가 우글대는 구덩이에 더운 물을 부어 뱀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면 옷을 벗긴 죄인을 밀어 넣는 벌도 있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조선 시대에도 팽형이 시행되었다. 중국처럼 실제로 기름이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넣지는 않아 약식 팽형인 셈이다. 부정을 저지른 고위 관리가 있으면 종로 네거리에 큼지막한 가마솥을 단다. 그런 다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죄인을 가마솥에 넣고 솥뚜껑을 덮는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죄인을 나오게 하는데 이때 가족은 초상이 난 듯 통곡을 한다. 팽형을 당한 사람은 호적에도 죽은 것으로 처리하여 공식적으로 사망자로 취급한다. 목숨을 잃지는 않아도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사형선고를 당한 것이다.

여당과 야당의 극심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던 ‘고위공무원범죄수사처’의 입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공수처는 여야가 타협할 조짐이 보이지 않아 또다시 물리적 도구가 등장하는 볼썽사나운 싸움이 벌어질 것 같던 사안이었다. 여야가 공수처 설치에 상반된 의견을 주장하여 정치권의 대립을 넘어 사회 불안을 조성했는데 법적으로 종결된 셈이다. 공수처는 고위공무원의 범죄를 척결하고 검찰권 행사의 오남용을 막아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한다. 목적은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이 목적이 이루어지면 갈망해 오던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가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누가, 어떤 사람이 공수처를 맡느냐에 따라 목적 달성이 판가름난다. 보아온 대로 권력자나 그들의 측근이 피의자인 경우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거나, 정경유착한 기업에 관대하다면 공수처는 권력과 금력의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권력자의 그릇된 속마음을 헤아리고 입맛에 맞추려 수사를 미적거리거나 공소해야 할 사건을 흐지부지 없애려 한다면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검찰에서 수사가 진행 중인 고위공직자의 범죄 사건을 공수처가 차지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는 듯하다. 검찰이 수사 중인 사건을 맡아 은밀히 사건의 축소나 은폐를 시도하면 부정과 비리를 방조하는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군림한다.

관건은 제도에 앞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명감을 가지고 오직 국민과 나라만 보고 일할 수 있는 올곧은 사람만이 공수처의 성공을 담보한다.

이참에 검찰은 왜 국민으로부터 불신당하고 개혁의 대상이 되어 기어이 공수처가 등장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법은 물이 흐르듯 상식이라는데 검찰권 행사가 상식과 한참 동떨어진 사례가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권력층을 위해 권한을 행사하고, 제 식구를 감싸는 집단이기주의 소행이 불러온 결과일 것이다. 권력에 기울어진 자세를 똑바로 세우지 않은 실망스러운 태도가 자초한 일이다.

가까운 나라에는 ‘범죄 피해자의 형사재판 참가제도’라는 것이 있다. 서구의 선진국도 피해자에게 공소권이 있다.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의견을 밝히고 형량을 제시할 수 있다. 강력사건일 경우 가해자를 벌주는 데에 피해자가 당연히 공소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피해자는 직접 이해 당사자이다. 피해자의 공소권은 세계적인 추세라는데도 우리에게는 금기의 말이나 다름없다. 검찰 기소권도 시대를 따라 독점을 내려놓아야 한다. 권력이든 경제든 독점은 일쑤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공정성을 벗어나 피해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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