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서숙 전경
아도서숙의 위치
아도서숙 강당
아도서숙 모습
무섬마을 북편 끝집 뒤에 위치
100년 전 무섬마을 전경

항일투쟁사의 중심적 일면, 무섬마을 ‘아도서숙(亞島書塾)’
농촌계몽, 문맹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 고취에 주력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인줄 모르고 수많은 종이에 물감 칠
18名이 한 줄에 포승, 흰 두루마기 끈도 못 매고 끌려가

아도서숙(亞島書塾)이 있는 무섬마을은 반남박씨 박수(朴수)가 마을을 개척하고, 박수의 증손서 김대(金臺)가 처가 마을로 들어오면서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수도교 건너 왼쪽으로 100여m 올라가면 우측 언덕에 현판도 안내판도 없는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옛 초가이던 아도서숙을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복원한 건물이다.

김광호 선성김씨 종손은 “일제 때 미루나무를 깎아 지은 초가 공회당(아도서숙)이 있었다고 전해온다”며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서숙(서당)이 설립되었으나 일제 탄압으로 폐숙됐다”고 말했다. 박승 전 무섬보존회장은 “당시 멍석 4개 깔아놓은 교실에 30-40명 앉아 ‘가갸거겨’를 합창했다”며 “또 이곳은 영주의 청년들이 모여 항일운동을 하던 비밀장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한직 전 무섬보존회장은 “저의 선친(金容鎭)께서도 서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아도서숙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복원하였으나 건축물에 대한 아쉬움이 많다”고 말했다.

‘아도(亞島)’는 ‘아세아 조선반도 내 수도리(水島里)’의 준말이고, ‘서숙(書塾)’은 옛날 서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도서숙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해우당의 증손자인 김화진(金華鎭)이 세운 학교이다.

 

당시(100년전) 무섬의 모습

일제강점기 당시 무섬마을은 중학교 진학은 거의 없고, 보통학교 졸업자도 한두 명뿐이었다.

대부분 가학으로 유교 교육을 받은 청년들은 3.1 만세운동 후 민족의식에 눈을 뜨면서 나라를 찾고 농촌도 살리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야학과 조합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아도서숙은 반상과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영주청년동맹, 신간회영주지회, 영주농민조합 등 단체에 나가 활동했다. 이곳은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단결의 장소’였고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설립동기 및 사업

3.1 만세운동이 있은 후 1922년 진학 목적으로 일본에 간 무섬출신 김화진 씨가 조선인으로서 심한 차별대우와 민족적 학대에 진학을 포기하고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영주청년동맹동지들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신간회영주지회 및 영주청년동맹을 이끌면서 고향 동지들과 공회당을 건립하여 ‘아도서숙’을 개교했다.

서숙은 부락 총의에 따라 운영위원을 선출하고 운영위원들(김화진, 김종진, 김성규, 김우규, 김계진, 김명진, 김광진, 김희규, 박찬하)이 성금을 내 운영·관리했다.

주요사업으로 첫째 글 모르는 사람에게 글을 가르치는 문맹퇴치운동, 둘째 우리글로 우리를 알게 하자는 민족교육, 셋째 우리의 얼을 드높여 같이 뭉치자는 민족정신 고양 등이 교육목표였다.

 

항일운동의 점화-전개

동양척식의 토지수탈사업의 심화로 농촌의 피폐가 가속화되어갔고, 사회전반이 3.1운동 후 항일 조류가 확산됐다. 신간회영주지회(1927년 8월 창립)와 영주청년동맹(1927년 11월 창립)이 청년운동의 구심체가 되고 있는 시점에 이를 이끄는 김화진 등이 중심이 되어 아도서숙을 개숙하게 됐다. 이로써 아도서숙은 지역 청년들에게 해갈의 장소, 불만 토로의 장이 되었고, 농촌을 살리자는 기운과 함께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반일민족운동이 점화됐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의 봉화가 오르자 북부경북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는 시위를 계획했다. 선전책임은 안기석(풍기출신), 활동책임은 김화진이 맡았다. 이에 아도서숙 운영위원 전원이 각 군내 모든 마을을 순회하면서 시위를 독려하던 중 동년 12월 김화진과 안기석이 체포 구금됐다. 그때 겨울 새벽길 5-6십리를 근 1개월간 다니다보니 대개의 위원들은 동상에 걸렸고, 부녀자들은 새벽까지 호롱불 밑에서 그것이 태극기인줄도 모르고 수많은 종이에 물감 칠을 했다고 한다.

 

수난의 서곡

1930년 10월 김화진이 10개월의 옥고를 마치고 귀향하게 되어 서숙은 활기를 되찾게 됐다. 특히 당시 영주청년운동의 구심체인 청년동맹을 수습 재조직하는 것이 시급했다. 군 소재지에서 현판식을 가졌으나 일경에 의해 철거당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수도리 공회당(아도서숙)에 영주청년동맹의 간판을 걸고 전군 대의원대회를 강행 재출범을 선언하게 됐다. 이로 인해 일경의 감찰이 서숙위원들의 행동을 제한하는 등 탄압이 극심해졌다.

 

농민운동, 비밀결사 조직으로

1931년 당시 신간회는 해산된 상태였고 청년동맹 마저 입지의 여지가 없도록 탄압이 가중되자 농민운동은 반일, 반식민지 저항 비밀결사 조직으로 속개됐다. 이때 조직책임으로 김화진이 선임되어 1931년 7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1931년 8월 일경의 감시 및 호출 조사의 도가 많아지더니 만주사변의 시발인 류비만 사건 발생 후 재차 아도서숙 요원 대부분이 10일 내지 1개월간 예비구치를 당했다. 심지어는 국내외 사건이 있을 때마다 보호 시찰령을 발동하기도 했다.

 

검거의 회오리

1932년 7월 27일 마을 앞 모래사장에 막걸리를 놓고 적농조의 진로에 대해 토론하고 막 집으로 돌아간 새벽 잠복 중이던 일경 약 1개 소대가 부락을 포위하고 가택수색과 조합원을 검거하기 시작 했다. 오전 5시 검거 압송자는 김화진을 비롯 18명이었다. 이 18명이 한 줄에 포승되어 흰 두루마기 끈도 못 매고 내성천을 지나 영주 서천변으로 끌려갔다.

그 후 1차와 똑같은 방법으로 일경의 새벽 검색이 계속돼 수도리 및 탄산리에서 15명이 검거되어 영주경찰서에 연행됐다.

 

아도서숙의 최후

결국 아도서숙은 개교 5년 만인 1933년 일제에 의해 불태워졌다.

징역을 마치고 모두가 귀향한 것은 1936년 2월, 이때부터는 고등계 형사가 마을에 상주하면서 호출 심문, 외지 출입을 통제하는 등 철저히 감시를 당했다.

투쟁가는 다 모였으나 일제는 발붙일 곳 없도록 압박하고 감시는 가중됐다.

투쟁가들은 정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부득이 멀리 은거, 잠행, 이향 등 생활을 하게 되었고, 대개 고문과 옥살이의 후유증에 의한 신병으로 40대 전후에 타계했다.

김화진은 투옥과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 직후 숨을 거뒀다. 무섬마을에서 독립운동 서훈을 받은 이는 다섯이다. 김화진, 김종진, 김계진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김성규, 김명진이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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