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무른 뿔을 세우고

- 장만호

어느 모진 장도리가
이 많은 못들을 죄다 뽑아놓고 갔을까
풀숲 언저리에
지천으로 널린 지렁이들
녹슬고 휜 못은 까치도 안 물어간다는데,
흔들리는 풀숲을 두고
달팽이는 또
어디로 갔나
빈 집에 깨진 자물쇠 하나 얹어두고
그 안에 적막 한 타래 감아 놓고
똑 똑,
연적에서 떨어진
몇 방울의 시간들은
어느 벼루 위에서 검게 고여 있나
무른 뿔을 세우고
어느 문장 위를 달리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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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는 피부호흡을 한다. 비가 오면 땅속으로 물이 고이고 지렁이는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올라오는데 갑자기 강한 햇볕을 만나면 체표면의 수분이 증발하여 죽게 된다. 그 모습이 마치 휘고 녹슨 못을 뽑아 놓은 것처럼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상황에 직면한다. 달팽이도 집을 비웠다. 집을 비우고 어디론가 떠난 지 오래다. 달팽이가 비운 집에는 적막만이 타래로 감겨있다. 순간 숲도 적막이다.

시적 공간을 열면 시간이 있고 시간 속엔 부재와 존재가 있다. 죽음과 삶이 있다. 삶은 번거롭고 번잡하다. 그 번잡함에서 벗어나면 고요와 정적이다. 고요와 정적은 곧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부재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 무른 뿔을 세우고 떠났을 무른 몸에 생각이 가서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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