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봉(작가)

삽화 이석희

 

입춘이 지나고 비가 내려 싹이 움트기 시작한다는 우수(雨水)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온 걸 제일 먼저 알리는 것은 풀색 짙어지는 언덕을 넘어 불어오는 뜨신 바람도 아니고 햇살 풀어진 들길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아니다. 머리맡 창가에서 재재거리며 잠을 깨우는 새소리다. 우리나라 청춘남녀들에게도 어느덧 기념일이 되어버린 밸런타인데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미덥지 않은 이야기들이 여럿 있지만 확실한 한 가지 진실이 있다. 새들이 교미를 시작하는 즈음이라는 것이다. 새들의 지저귐은 새로운 생명이나 희망의 태동과 관련이 있다.

어떤 책들은 세상을 바꾼다. 미국의 생태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2년에 내놓은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 세상에 던진 경고는 우리가 ‘얼마나 편리해야 하는가’에서 ‘얼마나 안전해야 하는가’로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그 시절 인간과 작물에 해를 입히는 곤충과 벌레들을 죽이는 DDT는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우리도 어린 시절 이를 잡겠다고 그 하얀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쓴 게름직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터다. 그녀는 그 책의 서두에서 DDT 등의 살충제나 제초제의 남용으로 흙과 물이 오염되고 그 벌레들을 잡아먹은 새들의 노랫소리도 사라진 침묵의 봄을 절망적으로 묘사함으로 인간들에게 환경문제로 눈을 돌리는 최초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 침묵의 봄은 절망과 죽음의 봄인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젊은 병사들의 배낭에 한 권씩 들어 있었다는 책이 있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이다. 생명이란, 삶이란, 머무르는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아픔이 따르고 우리는 그걸 성장통(成長痛)이라고 부른다. 그 성장통의 한 가운데 새가 있다.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의 그 구절을 줄줄 외고 다니던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새는 신의 고독한 휘파람소리다.

인간은 아득한 태곳적부터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들을 보며 날기를 꿈꿔왔다. ‘난다’는 것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고향생각’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 번 떠나온 후에’로 시작되던 노래 말이다. 에스파냐 민요라고 하기도 하고 흑인영가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작곡자가 따로 있고 옛 찬송가에 실리기도 한, 장송곡으로 흔히 쓰이던 ‘Flee as a bird’라는 노래다. ‘새처럼 날아가라’라는 말이다. 지치고 고단했던 세상살이를 끝내고 새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라는 뜻이리라. 이 노래에 쓰인 ‘flee’는 ‘날다’를 의미하는, 시(詩)에 흔히 쓰이는 ‘fly’의 고어(古語)이다. 어떤가? 자유롭다는 뜻의 ‘free’와 희한하게 같지 않은가?

그래서 비틀즈는 ‘Free as a bird(새처럼 자유롭게)’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는 자유의 또 다른 의미를 말해준다. 그 노랫말의 일부이다. ‘Where did we lose the touch/ That seemed to mean so much.’ 여기서 ‘터치(touch)’는 헤어진 연인의 손길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좀 더 나아가야 한다. ‘감동적인’이라는 뜻의 ‘touching’이라는 말을 보더라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한때는 그렇게 소중했던 감동을 우리는 어디에서 잃어버린 걸까?’ 조금만 더 나아가자. 감동이 없는 삶은 자유로울 수 없다.

어느 날, 예수가 하늘을 보며 군중들에게 말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지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느니라.” 그러나 예수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얻어지는 자유란 없다. 신이 새들에게 먹이를 주기는 하지만 둥지에 던져 넣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어느 잡지에 ‘새들처럼’이라는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그 말미를 옮겨 적어 이 글을 맺는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막 꽃망울을 틔우려는 산수유 가지 위에 작은 새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그 새소리 곡조 삼아 한시(漢詩) 한 구절 읊조려 봅니다.

庭樹彼啼鳥 何山宿早來/ 應知山中事 杜鵑何日開 (뜰의 나무에 앉아 지저귀는 작은 새는/ 어느 산에서 자고 왔을까/ 새야, 너는 산에서 왔으니 산의 일을 알겠네/ 진달래꽃 언제 필지 가르쳐 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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